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수상한 시절,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이란 이름의 꽃은 아롱지게 피어난다. 그리고 비극적인 시대를 마주하는 청춘남녀들의 화려한 꿈과 바람은 오히려 더욱 빛이 난다. 누군가는 성공한 사업가를 꿈꾸며, 다른 누군가는 미래의 의사를 그리며 내달리듯 달려가는 1930년을 살아간 그들에게도 ‘열정’이 분명 꿈틀댔으리라.

세상을 살다 보면 무심코 다가오는 인연의 신비한 낚시 바늘은 기적과도 같은 일들을 건져내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안에서 치명적인 사랑이 잉태되기도 한다. 토막토막의 추억들을 토해내는 불안의 응어리들, 심연의 바닥을 긁어내는 아픔들은 사랑을 위한 대가로 지불된다. 그러나 그 충만하고 풍요로운 존재는 모든 것을 치유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말이다.

19살이 된 준주는 산부인과 여의사를 꿈꾸는 미모의 여학생이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보란 듯이 이겨내고 부산항에서 은사(恩師) 오가와가 반겨줄 도쿄로 떠나기 위해 배에 몸을 싣는다. 꿈틀거리듯 일렁이는 현해탄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원수의 땅이자 기회의 땅 도쿄에는 독립운동을 돕는 준주의 사촌오빠 진석과 사업가로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는 준주의 옛 친구 현서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일본 형사 모리 역시 자신의 본능을 믿고 도쿄에 따라온다.

어렵게 의과대에 합격한 준주는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만난다. 상대는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인 도오루. 둘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을 인정하고, 뒤숭숭한 세상의 단면 위를 거닐며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운다. 그러나 흔들리는 격동의 시대는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준주와 도오루는 그렇게 위태로운 사랑을 감내해 간다.

어려운 시절 적국과의 러브스토리는 자칫 잘못하면 온통 잿빛 분위기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작가는 그런 점을 간파하고 어려운 시절을 밝은 느낌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내면에 녹아있는 망향은 역시 가볍지 않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산부인과 여의사의 삶과 사랑이란 흔하지 않은 주제 역시 뇌리에 남는다.

‘분홍구두’는 아리따운 소녀가 분홍색 신을 신고 벚꽃이 충만한 봄의 정원에서 왈츠를 추는 듯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 동장군으로 정원 곳곳이 얼어 있지만, 위태로움이 있기에 예쁜 분홍구두는 더욱 빛이 난다.

조양희 지음 / 마음의숲 펴냄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