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 천경자 화백의 모습 (사진출처: 연합뉴스)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 선언, 미국 떠나
타계 두 달 만에 뒤늦게 알려져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로 꼽히는 천경자 화백이 91살을 일기로 두 달 전 미국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천경자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뇌출혈로 투병해오던 천 화백이 지난 8월 초 미국 뉴욕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장례를 치른 뒤 8월 중순에는 이씨가 천 화백의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 수장고를 다녀간 것으로 전해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일본 유학을 거쳐 화가로 활동해왔으며, 1970년대부터 화려한 색채의 인물화를 선보여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 화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한 많은 사랑으로 얼룩졌으며, 위작 논란으로 고독의 삶을 사는 등 순탄치 않았다.

1940년 16세 때 도쿄 유학길에 올라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1942년 제22회 선전에서 ‘조부’로 입선한다. 이 그림은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외할아버지가 손녀를 위해 모델이 되어준 초상화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던 자신에게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네준 명문대생 이철식과의 인연으로 1944년 결혼한 뒤 이듬해 첫 딸 혜선씨를 낳는다. 하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남편 없이 두 아이(1남 1녀)를 기르던 천 화백은 전남 모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작고)씨를 만나 유머 넘치고 건장한 그에게 푹 빠진다. 그와의 사이에서도 역시 1남 1녀를 둔다. 하지만 그는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김씨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 화백은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간다.

천 화백 그림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은 자신을 모델로 그린 것이며, 때로는 아이들과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72년에는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10명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홍일점 종군화가로 참전하기도 한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고비는 67세였던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 사건이었다. 위작 논란이 일자 천경자 화백은 직접 미인도를 감정했는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선언했으나, 감정단은 천 화백의 작품이 맞다는 감정결과를 낸다.

이에 천 화백은 “자식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며 위작이란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고 수군거렸다. 그 충격으로 천 화백은 절필선언을 한 후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1998년 일시 귀국해 서울시립미술관에 피붙이처럼 아끼던 채색화와 스케치작품 90여점을 기증했다.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는 외부 활동을 중단한 채 지내다가 지난 8월 6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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