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단 활개로 무법천지 아이티
총리 사퇴·과도 정부 구성키로
유엔군 아직 현지 배치 안 돼
“갱단과 대화 없이 해결 없어”

아이티의 미래는 어디로 갈까. 1일(현지시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한 시위대가 아리엘 앙리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아이티 국기를 들고 있다. (출처: 뉴시스)
아이티의 미래는 어디로 갈까. 1일(현지시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한 시위대가 아리엘 앙리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아이티 국기를 들고 있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이솜 기자] 갱단의 무장 폭력에 ‘무정부 상태’로 치닫던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총리가 사임 의사를 밝히며 이를 대체할 과도위원회가 구성된다.

AP통신에 따르면 12일(현지시간) 아이티 사태를 중재하는 카리브해 국가들과 미국은 아이티 폭력 사태 진정을 위한 최선의 희망은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에 있다고 발표했다. 이를 통해 임시 지도자를 선출하고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구상이다.

이에 아이티의 미래가 전통적인 정치권력을 향할지 갱단의 힘에 초점을 맞춘 방향이 될지 주목되고 있다. 아이티 정치는 수십년 동안 이 두 가지 세계에서 살아왔다. 정치인과 재계는 이권을 유지하면서 갱단을 고용해 혼란스러운 거리에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왔다. 그리고 국민이 그 값을 치르는 중이다.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는 이날 과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구성되면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카리브공동체(CARICOM, 카리콤) 순회의장국인 모하메드 이르판 알리 가이아나 대통령은 과도 정부에 투표권을 가진 위원 7명과 투표권이 없는 위원 2명으로 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알리 대통령은 이 위원회의 대표들은 민간 부문과 시민사회 출신으로 구성되며 종교 지도자 한 명도 포함될 것이라고 말했다.

앙리 총리의 사임은 갱단의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나 앙리 총리의 사임 이후에 갱단도 물러난 의향이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포르토프랭스=AP/뉴시스] 5일(현지시각)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델마6 지역에서 전직 경찰 간부 출신이며 '바비큐'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아이티 갱단 'G9'의 두목 지미 셰리지에가 기자회견하고 있다. 셰리지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리엘 앙리 총리가 이끄는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4.03.06.
[포르토프랭스=AP/뉴시스] 5일(현지시각)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델마6 지역에서 전직 경찰 간부 출신이며 '바비큐'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아이티 갱단 'G9'의 두목 지미 셰리지에가 기자회견하고 있다. 셰리지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리엘 앙리 총리가 이끄는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4.03.06.

◆“외세 220년 간섭이 실패한 국가 만들어”

아이티가 마지막 선거를 치른 지 7년,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당한 지 거의 3년, 마지막 선출직 공직자들이 퇴임한 지 1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이티에 민주주의가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아이티의 위기는 직접적으로는 모이즈 대통령의 암살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그 뿌리에는 2010년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적 재앙, ‘파파독’과 ‘베이비독’으로 알려진 뒤발리에 부자(父子)의 29년 독재 통치, 1804년 독립 이후 프랑스에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배상금 등이 자리하고 있다고 12일 영국 일간 가디언은 분석했다.

전 미국 아이티 특사인 다니엘 푸트는 가디언에 “지난 220년 동안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간섭으로 아이티는 실패한 국가가 됐다”며 “국민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발언권이 없고 미래에 대한 발언권이 없었으며, 국제사회가 꼭두각시 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년간 이미 끔찍했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유엔에 따르면 작년 갱단 관련 폭력으로 거의 4000명이 사망하고 3000명이 납치됐다. 작년 10월까지 여성에 대한 공격은 1100건이 발생하는 등 성폭력도 만연했다.

이에 피난민은 30만명 이상이 발생했는데 지난 한 주 동안에만 최소 1만 5000명이 집을 떠나야했다. 인구의 절반은 식량이 부족한 가운데 살고 있다. 전기, 깨끗한 물, 쓰레기 수거와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도 불안정하다. 2023년의 최종 수치는 아이티 경제가 5년 연속 위축됐음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2주간의 사건으로 인해 아이티의 불확실성과 비관론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갱단은 교도소를 습격하고 항구를 장악하고 수십개의 상점과 경찰서를 불태우고 국제 공항까지 포위하는 등 수도에 아비규환을 불렀다. 유엔 인도주의 사무소는 지난주 아이티의 의료 서비스가 붕괴 직전에 이르렀으며, 병원에는 총상 입은 피해자들이 넘쳐나고 직원과 물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혼란이 시작될 당시 아이티에 있었던 안보 전문가 로맹 르쿠르는 “지금 아이티의 인도주의적 상황은 참혹하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18일(현지시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여성이 불에 탄 타이어를 지나쳐 걸어가고 있다. (출처: 뉴시스)
18일(현지시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여성이 불에 탄 타이어를 지나쳐 걸어가고 있다. (출처: 뉴시스)

◆갱단, 수도 80% 장악… 경찰력 부족

정치권력의 공백은 갱단이 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아이티에는 200개 이상의 갱단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크게 전직 고위 경찰관인 지미 셰리지에가 이끄는 연합체 ‘G9’와 가브리엘 장 피에르의 ‘G펩’이다.

최근까지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아이티의 정치 및 경제 엘리트층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나 납치 몸값으로 운영 자금을 조달하면서 더욱 독립적인 조직이 됐다.

반면 현역 경찰은 약 1만명 밖에 안 돼 경찰력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다. 유엔의 추산에 따르면 약 2만 6000명의 경찰이 필요하다. 작년에는 경찰관 약 1600명이 물러났다.

전문가들은 작년 10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갱단 소탕을 위해 아이티에 다국적 안보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 폭력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갱단들이 유엔에서 보낸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고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유엔이 케냐가 이끄는 국제군 지원을 발표하자 일각에서는 갱단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제기됐다.

이 계획은 공식적인 유엔 평화유지군은 아니다. 가디언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는 2004~2017년 유엔 임무의 재앙적인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끔찍한 성추행 혐의와 유엔 캠프의 물이 거의 1만명을 숨지게 한 콜레라 발병에 연루돼 유엔 평화유지군의 명예가 훼손된 바 있다. 또 이번 부대의 임무는 갱단 제거가 아니라 수도로 통하는 주요 경로를 장악하고 국가 기반 시설을 보호하며 치안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유엔으로부터 임무를 받은 지 5개월이 지났지만 군은 아직 현지에 배치되지 않았다. 베냉에서 인력 2000명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으며 차드, 방글라데시, 바베이도스, 바하마 정부도 장교를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케냐 정부는 최대 5000명의 병력을 이끌 경찰 1000명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계획이 위헌이라는 법원 판결에 파견이 미뤄지는 양상이다. 여기에 앙리 총리의 사임 성명 이후 케냐 외무부는 새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파병 계획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아이티 크레올어나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는 비교적 소규모의 케냐 주도 군대가 유혈 사태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지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갱단 소통 정치인들 역할이 중요”

앙리 총리의 사임과 위원회 소식이 나오자 아이티 전역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아이티의 미래에 대한 발언권을 요구하는 갱단들도 선거에 뛰어들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갱단과의 대화가 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버지니아 대학의 아이티 정치 전문가인 로버트 패튼은 AP통신에 “다른 종류의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도 현실은 갱단과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갱단이 수도를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사실을 꼬집었다. 그는 “그들(갱단)이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고 반대 세력이 없다면, 그들을 테이블에 앉힐지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그냥 테이블을 차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제 위기 그룹의 레나타 세구라는 앞으로 현재 갱단과 소통하는 정치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미 갱단과의 협상이 진행 중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13일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던 고등학교 교사 조나스 장 피에르(40)는 AP통신에 앞으로 아이티의 진로가 바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임을 발표하는 앙리 총리의 짧은 연설이 신경쓰인다며 “총리가 아이티 국민에게 ‘죄송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없이 뒷문으로 떠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장 피에르는 “언젠가 다국적군이 아이티에 파견되더라도 위기 해결을 보장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키워드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