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의 역사(歷史)를 소개하기 전에 우선 종두인허원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과정을 언급하고 본격적으로 그 역사를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필자가 우두(牛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있었던 증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구체적으로 당시 집안의 재당숙(在堂叔)으로부터 “너의 증조부(曾祖父)가 방골에서 우두(牛痘)를 놓으셨다”는 증언을 들은 것이 박승석(朴勝錫)의 행적(行跡)을 알게 된 최초의 단서였다.

흔히 우두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을 거론할 수가 있는데 송촌은 1855(철종 6)년생인데 비하여 박승석은 1865(고종 2)년생이니 연배(年輩)로는 송촌보다 10년 연하(年下)가 된다.

필자는 우두(牛痘)와 관련된 박승석(朴勝錫)의 행적(行跡)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2가지 항목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첫째.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과 관련된 부분이다. 정약용은 조선후기(朝鮮後期) 실학(實學)을 집대성(集大成)한 대학자(大學者)로서 1801(순조 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났을 때 강진으로 유배 가게 되어 18년 동안 머물렀으며, 3대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하여 500여권의 저술을 후세에 남겼다.

그런데 사암이 우두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의 저술인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의서(醫書)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1797(정조 21)년 정약용이 곡산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재임 중에 저술한 것이며 내용은 마진(麻疹)의 치료(治療)에 관한 것인데, 이 책에 우두에 대하여도 자세히 소개하였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래서 박승석이 우두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이 혹시 사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1836(헌종 2)년 향년(享年) 75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했으며, 박승석은 1865(고종 2)년생이니 사암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는 힘들었겠지만 그 정신만큼은 계승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조사하였으나 사암과의 관련성 여부를 규명하지 못했다.

둘째.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과 관련된 부분이다. 지석영은 1855(철종 6)년생으로서 조선(朝鮮)에 우두법(牛痘法)을 널리 보급한 인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점에 착안하여 박승석이 우두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 송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조사하였으나 이 부분도 관련성을 밝혀내지 못했다.

덧붙이면 박승석과 정약용과 지석영의 연관성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관과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였으나 그 실체(實體)를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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