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지금은 분단으로 갈 수 없는 땅 평양. 고구려의 옛 도읍지이며 예부터 광활한 풍광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고려 때 학사 김황원(金黃元)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 시를 지으려 했다. 그러나 시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김황원은 달이 중천에 떠오른 후에야 겨우 한 연(聯)을 얻고 통곡하면서 내려왔다.

“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긴 성 한쪽은 물 조용히 흐르고, 큰 들판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로다)

시를 잘 짓는 사람이라도 평양을 바라보면 이 이상 표현할 재주가 없다는 뜻으로 회자 돼 온 시구다. 평양은 정말 넓은 도시인 모양이다.

조선시대 호방한 사대부라면 한번쯤 욕심을 낼만한 자리가 평양감사였다. 지방 감사들을 도백(道伯)이라고 부른 대신 평양감사에게는 특별히 ‘기백(箕伯)’이란 칭호를 붙였다. 고대 기자조선의 도읍지라는 데 연유한 것이다.

평양은 또 서도(西都) 혹은 유경(柳京)이라고 불리었다. 유경이란 고구려 평양 도읍기부터 대동강변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생존 당시 평양 제일의 105층 고층호텔이름을 ‘유경호텔’이라고 명명했다.

평양은 서울 다음가는 큰 도시로 물자가 풍부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호기심으로 작용한 것은 기생들과 한껏 풍류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명기의 고장을 지칭할 때 ‘ 일(一) 평양, 이(二) 진주’라고 한 것은 이곳이 제일의 색향이었음을 알려준다.

조선 중엽 시인 임제(林悌)는 과거에 급제하여 서도병마사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서도병마사란 무관직으로 관찰사가 겸임했으므로 평양감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그가 개경을 지났을 때 명기 황진이의 부음을 들었다. 임제는 안타까운 마음에 황진이의 묘소를 찾아가 술잔을 부어놓고 그 영혼을 위로했다.

이 같은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제는 평양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파직을 당하고 만다. 관복을 입은 자가 천인인 기생의 무덤에 잔을 부어놓고 머리를 굽힐 수 있느냐고 탄핵을 받은 것이다. 임제가 평양감사로 부임했더라면 기생들과 더 많은 일화를 만들고 멋들어진 시를 남겼을 게다.

‘삼선기(三仙記)’는 이춘풍이란 선비가 평양에서 기생들과 일생을 풍류로 살았다는 내용을 담은 한문소설이다. 기생들에게 꿈의 도시이며 풍류남아의 이상향이 평양이었다는 것을 그렸다. 주인공 춘풍은 평양에 교방을 만들어 두 명의 기생을 수석으로 삼아 24교방을 거느렸는데 지상삼선(地上三仙)으로 불린다.

이 소설에 표현된 평양감사 주재의 대동강 선유풍류(船遊風流)를 보자. 배에는 기생들과 악사 그리고 삼십여 가지가 넘는 술을 실었다. 또 항아리 속에는 각종 과일과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하늘을 찌를 듯 사령기가 나부끼고 꽃 같은 기생들은 권주가를 불러 흥을 돋운다.

평양은 사신들이 연경을 갈 때는 꼭 지나가야 하는 자리였다. 평양감사는 왕명을 받고 중국에 가는 이들을 특별히 접대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사행단은 3일씩 평양에 묵으면서 술과 기생들에 파묻혀 살았다. 순조 때 문신 이해응(李海應)은 ‘계산기정(薊山紀程)’에서 “평양에서 3일씩 묵어 성색(聲色)과 음식을 계속하다보니 도리어 괴로움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최근 평양에서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관광여객선이 등장했다고 한다.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호화유람선이라고 선전하지만 아직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울긋불긋 한복을 차려 입고 선유를 즐기는 평양 주부들의 모습도 어색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북한에서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일이다. 하루빨리 평양의 문을 열고 국제사회로 나와 가난을 떨쳐야 한다. 그래야 평양시민들의 대동강 유람도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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