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연천의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는 동면 현사리를 비롯해 옥산리 오미, 내대리, 당후, 좌찬리, 율동, 와초리원우, 세류동, 상수리, 사대동, 가척리, 지사의 군민들이 참여했는데 그중에 율동에 거주하던 박승석(朴勝錫)도 50전을 의연(義捐)한 기사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7(융희 1)년 8월 7일자 기사에서 확인된 것이다.

그 이외에 서면 소포리, 관인면 중리, 북면의 군민들도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또한 1906(광무 10)년 신정균(申鼎均)과 박동빈(朴東彬)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일신의숙에서도 교사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을 주목한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당시 연천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다른 지역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어떤 단체를 조직하여 그 단체를 주도한 인물을 중심으로 모금운동(募金運動)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록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필자가 이번에 발견된 새로운 기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배경에는 그동안 박승석의 1913년 이전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43세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확인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승석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사실은 그의 70 평생 중에서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 이외의 행적을 거의 몰랐던 상황에서 그 생애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대목이 있는데 박승석의 차남(次男) 박의서(朴義緖)가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軍資金募集)하다가 행방불명(行方不明)된 것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박의서가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한 배경에 박승석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막연히 추정을 하였으나 그동안 이를 구체화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새로운 단서가 발견되었으니 이를 국채보상운동 참여로 본다. 또한 박승석이 단순히 의연금(義捐金)을 출연(出捐)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구체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인지 여부도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덧붙이면 이번에 자료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연천의 국채보상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앞으로 박승석이 국채보상운동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인지 여부와 병행해 규명해야 할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다.

한편 박승석이 43세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6년 후가 되는 1913년에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으로 면허(免許)를 인가받으면서 우두의사(牛痘醫師)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나 그 구체적인 경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73세의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박승석이 교류(交流)한 인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그의 행적이 자세히 규명되지 않은 하나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박승석의 뚜렷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종두인허원으로서의 활동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용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 역사(歷史)를 소개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