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박승석(朴勝錫)의 어린 시절과 관련해 알려진 유일한 사실은 본래 생부(生父)는 박기양(朴沂陽)이나 박도양(朴道陽)의 아들로 출계(出系)하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박도양이 세상을 떠난 이후 박승석이 탄생한 것으로 볼 때 사후양자(死後養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정확히 언제 출계하였는지 그 내력을 알 수 없다.

사실 오랜 세월 박승석의 생애를 조사하면서 유년기(幼年期)부터 중년기(中年期)에 이르는 그 흔적을 알 수 없었는데 최근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어 본보(本報)에 최초로 공개한다.

필자는 그동안 1907년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사실이 헤이그특사(特使)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은 고종황제(高宗皇帝)에 의하여 극비밀리에 임명된 3명의 특사 즉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하여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특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석하여 1905년 11월 22일에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성(不當性)을 전 세계(全世界)에 호소하려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와 강대국들의 무관심으로 결국 특사들의 만국평화회의 참석이 무산되었으며 결국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이준 특사가 장렬히 순국(殉國)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결국 고종황제가 강제로 양위(讓位)되고 순종황제(純宗皇帝)가 즉위(卽位)하는 사건으로 비화(飛火)되고 말았다. 그런데 같은 해에 헤이그특사 사건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박승석의 새로운 행적(行跡)과 관련이 있는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융희 1)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 부사장이었던 서상돈(徐相敦)의 발의로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의 취지는 당시 일제에게 빌린 1300만원의 차관(借款)을 우리민족의 힘으로 상환(償還)하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전국적인 모금운동(募金運動)으로 발전되었는데 이러한 지역에 연천이 포함된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국채보상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몰랐는데 이번에 구체적인 내력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연천에서 언제 처음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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