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후유증 군인 재활에 도움…오피오이드 확산 방지 기대"
WHO "우크라이나 PTSD 환자 960만명 추산"…"마약산업 합법화" 야권은 반대

지난해 3월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에서 부상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병상에 누워 있다. 2022.02.02. (출처: AP=연합뉴스)
지난해 3월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에서 부상한 우크라이나 군인이 병상에 누워 있다. 2022.02.02. (출처: AP=연합뉴스)

2년 가까이 계속되는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다수 국민이 후유증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를 돕기 위한 의료용 대마 합법화 법안이 최종 통과를 앞두고 있다.

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더타임스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서 의료용 대마의 재배·제조·이용을 허용하는 법안이 의회를 문턱을 넘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서명만을 남겨둔 상태다.

이 법이 시행되면 세계보건기구(WHO) 추산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가까운 약 960만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PTSD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 병사 출신인 이반 도로셴코(38)의 사례는 의료용 대마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레슬링 챔피언 출신으로 평소 술도 거의 마시지 않던 도로셴코는 전쟁 발발 이후 위험하고 힘든 정찰 임무도 묵묵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 격전지인 우크라이나 동남부 자포리자에서 맞은 재앙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그의 소대는 전선에서 약 15㎞ 후방에 있는 한 작은 가정집에서 자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전선에 투입되곤 했다.

도로셴코가 소대원의 약 절반과 함께 전투 임무에 나선 사이 러시아군 로켓이 가옥을 강타, 남아 있던 소대원 중 2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을 입은 것이다.

그는 전선에서 돌아와 보니 "온통 벽돌과 피가 뒤범벅이 된 끔찍한 광경이었다"면서 "우리 화기지원 소대의 절반이 사라졌다. 내 친구들과 형제들, 우리는 모두 함께 지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후 가족의 품에 돌아왔지만, PTSD가 점차 심해졌다. 어떤 날에는 참혹했던 그날을 꿈속에서 계속 되풀이해서 체험하기도 했고 하룻밤에 5∼6번씩 잠에서 깨기도 했다.

도로셴코는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악몽이라고 부르겠지만, 내게는 무엇이 꿈이고 현실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의 다리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두통도 심해졌다. 그러다가 궤양으로 피를 토해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 사이 의사가 그의 수면을 위해 진정제를 처방해주기도 했지만,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느낌이 지속되는 '브레인 포그'(brain fog) 증상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그의 전우가 폴란드에서 제조된 대마 성분 칸나비디올(CBD)을 함유한 기름을 그에게 줬다.

도로셴코는 매일 밤 자기 전에 CBD 기름 3∼5방울을 섭취하자 진정제를 쓸 때와는 달리 브레인 포그 증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걸 쓰고 나면 기분이 아주 좋다"면서 "두통, 고혈압, 뇌진탕 후유증에 도움이 됐다. 내 전우들도 그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안정돼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마 성분 중 의존·남용 위험성이 거의 없는 CBD를 함유한 기름은 건강보조식품으로 간주돼 이미 우크라이나에서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팔다리 절단으로 환상통을 느끼는 환자 등 더 증상이 심각한 환자를 위해 함량이 더 높은 의료용 대마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업고 이번 합법화 법안이 나왔다.

의료용 대마는 연구 결과 항암치료를 받는 암 환자의 고통과 메스꺼움을 가라앉히고 뇌성마비 환자의 발작 가능성을 줄여주는 등 효과를 보이면서 유럽 다수 국가에서 이미 합법화됐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 여파에 급속히 퍼지고 있는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의 확산을 막고 PTSD를 겪는 군인들의 재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율리아 티모셴코 전 총리 등 야권에서는 마약산업을 합법화한다며 의료용 대마 합법화에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의료계에서는 많은 국민의 PTSD를 덜어주기 위해 의료용 대마 합법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더타임스는 전했다.

마취과 의사 빅토리야 예우세예바 박사는 우크라이나도 미국·유럽처럼 오피오이드 확산 문제가 심각하다면서 부작용이 거의 없고 효과적인 의료용 대마가 오피오이드 확산을 막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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