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영남(嶺南)의 대학자(大學者)로 명성을 떨쳤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1554(명종 9)년에 탄생하였으며 18세에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을 정도로 그 학문의 경지가 대단했다.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 ‘역할도설(易學圖說)’을 저술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보령 현감(保寧縣監)과 의성 현감(義城縣監)을 역임한 것 이외에 대부분 나아가지 않고 학문의 길에 매진하였으며 1637(인조 15)년 향년(享年) 84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평소에 숫자에 관심이 많으며 특히 연도(年度)의 의미를 중시하는 편인데, 이러한 장현광이 별세한지 300주년 되는 해에 별세한 인물이 있으니 본 칼럼에 소개하는 박승석(朴勝錫)이다.

박승석은 조선(朝鮮)에 우두법(牛痘法)을 도입한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보다 10세 연하(年下)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우두의사(牛痘醫師)의 역할을 수행한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박승석이 어떤 경위로 종두인허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조사하였으나 결국 규명하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천연두(天然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두창(痘瘡)의 발원지(發源地)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이며 인도에서 572년부터 에티오피아를 거쳐 유럽에 이르고 동아시아에도 파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두창이 중국에 들어온 경로는 흉노족의 침입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서역으로부터 천신산맥을 거쳐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국 서북방에 유입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두창(痘瘡)이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온 경로를 살펴보면 요동반도를 거치거나 아니면 산둥 반도로부터 황해를 건너서 유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창(痘瘡)은 전염병(傳染病)중에서 특히 치사율(致死率)이 높은 바이러스로 완치가 된다고 하더라도 얼굴에 곰보 자국이 생기는 등 그 후유증이 컸다.

조선(朝鮮)의 백성들에게 두창(痘瘡)은 한마디로 공포(恐怖)의 질병(疾病)이었는데 그 호칭을 마마라고 표현한 것을 통하여 볼 때 그 파급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성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던 두창이 1879((고종 16)년 지석영이 종두법(種痘法)을 실시하면서 두창이 훗날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종두법(種痘法)은 두창(痘瘡)을 예방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인두법(人痘法)과 우두법(牛痘法)이 있다.

인두법(人痘法)은 두창(痘瘡)의 독(毒)을 인공적으로 인체에 접촉시켜 그 독력(毒力)을 약하게 하는 방법이며, 이에 반하여 우두법(牛痘法)은 두창(痘瘡)에 걸린 소의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해 두창(痘瘡)의 면역력을 얻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에 의하여 공동 연구된 인두법을 포천 출신 의관(醫官) 이종인(李鍾仁)이 널리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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