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마련
고구려실 ‘원석탁본’ 공개
실물처럼 디지털로도 재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에서 디지털로 되살아난 광개토왕릉비ⓒ천지일보 2024.01.24.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의 길’에서 디지털로 되살아난 광개토왕릉비ⓒ천지일보 2024.01.24.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는 414년 세워진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진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시호다. 아들 장수왕(재위 413~491)은 국내성(옛 고구려 수도, 현 중국 지안성) 동쪽 언덕에 이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1600여년 전 동북아 강국을 이룩한 고구려인들의 생생한 역사가 담겨져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광개토대왕릉비 원석탁본(청명본)을 상설전시관 고구려실에 전시하면서 비석에 새겨진 내용이 주목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논란이 계속되는 만큼 올바른 역사 인식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또한 박물관은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에 디지털로 복원된 원석탁본 족자를 전시하고 LED미디어 타워를 설치해 디지털로 재현한 광개토대왕릉비 영상을 공개했다.

광개토대왕릉비 동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4.01.29.
광개토대왕릉비 동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4.01.29.

◆‘광개토대왕릉비’란

29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광개토대왕릉비’는 최대 높이 6.39m의 화강암 4면에 총 1775자를 새겨 넣은 비석이다. 이 비석은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며 당시 고구려와 백제, 신라뿐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까지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디지털로 복원된 원석탁본 족자가 공개됐다. 류정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관은 “전체 비문의 구조에 맞춰 글자를 재배열하고 실제 크기로 족자 제작을 해서 관람객에게 선보이게 됐다”며 “남서쪽으로 돌아가면서 비문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비석은 총 4면으로 구성됐다. 제1면은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주몽)과 그를 이은 17세손 광개토대왕의 직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됐다. 2면은 1면 내용이 계속 이어지는데,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정벌해 성 58개, 마을 700개를 획득하는 큰 승리를 거뒀다. 당시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에 항복해 앞으로 광개토대왕의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하지만, 이를 깨고 왜나라와 손을 잡는다. 이후 신라가 왜나라에 침입당하고 고구려에 구원 요청을 했고, 광개토대왕은 5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구하고 왜나라와 전투를 벌인다.

3면은 신라의 구원과 전쟁 내용이 이어지고, 그 이후 국제 정세를 담아냈다.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영토는 성 64개, 마을 1400여개에 달한다고 기록됐다. 또 왕릉 관리 규정인 수묘제(守墓制)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당시 정벌한 지역에서 사람을 뽑아 왕릉을 관리했는데 어떤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데려왔는지가 담겼다.

4면도 수묘제 내용이 이어진다. 수묘인을 임의로 매매하거나 거래하지 못하도록 해 고구려 왕릉이 향후 안정적으로 관리되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첩 청명본(시호 부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4.01.29.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첩 청명본(시호 부분)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 2024.01.29.

◆‘원석탁본’ 국내 3종 전해져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원석탁본을 확보한 계기로, 이를 전시에 공개했다. 해당 원석탁본은 한학자였던 청명(靑溟) 임창순 선생이 소장했기에 ‘청명본’이라고 불린다. 이 판본은 1889년 리원충이 탁복한 것으로 세 글자씩 잘라서 만들어졌다. 3면과 4면의 일부가 결락돼 있어 완전한 판본은 아니다.

류 학예연구관은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멸망 후 한동안 기억에 잊혀져 있었다”며 “비석 발견 당시 넝쿨과 이끼 등이 두텁게 껴있어서 어느 나라의 비석인지조차 분간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19세기 말, 비석에 대한 탁본 작업이 시작됐다. 이끼와 넝쿨 제거를 위해 비석에 불을 질렀으며, 이때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 이후 석회와 진흙을 발라 면을 고르게 한 후 탁본을 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글자가 왜곡됐다. 석회와 진흙이 발라지기 이전의 탁본을 ‘원석탁본’, 이후의 것을 ‘석회탁본’이라고 한다.

류 학예연구관은 “비석의 연구에 있어서 ‘원석탁본’이 ‘석회탁본’보다 더욱 가치가 크다”며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은 한·중·일 등에 120여종이 전해지며, 원석탁본은 18종뿐이고 국내에는 3종이 전해진다”고 말했다.

학계의 연구 결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원석탁본이 청명본의 3면의 사라진 부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탁본 등을 통해 3면과 4면의 사라진 부분을 보완하게 됐다.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 광개토대왕릉비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며 “올해는 디지털 복원과 원석탁본을 함께 전시해 고구려 관련 콘텐츠를 강화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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