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김안국(金安國)은 1519(중종 14)년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파직(罷職)되어 고향인 경기도 여주군 주촌에 은거(隱居)하면서 이곳에 소재(小齋)를 건립하여 현판(懸板)을 ‘은일(隱逸)’이라 칭하고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면서 후학양성(後學養成)에 전념하였다.

그 이후 18년이 지난 1537(중종 32)년 다시 등용(登用)되어 상호군 겸동지성균관사(上護軍兼同知成均館事)를 시작으로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사헌(大司憲),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참찬(左參贊), 대제학(大提學), 찬성(贊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를 역임하였다.

​여기서 김안국의 다양한 관직생활(官職生活)에 있어서 핵심 포인트는 선비들의 추앙(推仰)의 대상(對象)이라 할 수 있는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당시 모재(慕齋)의 위상(位相)이 어느 정도 비중이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1542(중종 37)년 함경도(咸鏡道)에서 온역(瘟疫)이 크게 유행하자 왕명(王命)으로 박세거(朴世擧), 홍침(洪沈), 문세련(文世璉), 유지번(柳之蕃), 이척(李倜), 정추(鄭樞), 홍세하(洪世河) 등과 함께 온역에 대해 소개한 여러 의서(醫書)들 가운데 이용하기 쉬운 처방(處方)들과 상비약(常備藥)들을 중심으로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을 편찬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와 관련해 1542(중종 37)년은 김안국이 별세(別世)하기 전 해가 되는 것인데, 이를 통하여 모재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의서 편찬(醫書編纂)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덧붙이면 김안국이 여러 의관(醫官)들과 함께 편찬하였던 ‘분문온역이해방(分門瘟疫易解方)’이란 온역을 퇴치(退治)하기 위해 조정(朝廷)에서 건행(刊行)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한 의서(醫書)라 할 수 있다.

​한편 김안국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재임 중에 의성(義城)을 방문하여 김용비(金龍庇)의 사당(祠堂)에 진민사(鎭民祠)란 편액(遍額)을 써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모재의 모습을 통하여 평소 숭조돈종(崇祖敦宗)에 얼마나 깊은 관심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탁월한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시문(詩文)에 명성이 있었으며, 특히 유의(儒醫)로서 의학에도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던 김안국은 마침내 1543(중종 38)년 향년(享年) 66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다.

​김안국은 사후(死後) 문경공(文敬公)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인종(仁宗)의 묘정(廟廷)에 배항(配享)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주(驪州)의 기천서원(沂川書院)),이천(利川)의 설봉서원(雪峯書院),의성(義城)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끝으로 고매한 인품(人品)과 함께 탁월한 학문(學文)과 경륜(經綸)을 겸비(蒹備)하였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생애(生涯)가 우리사회에 널리 전파(傳播)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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