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김안국(金安國)은 1510(중종 5)년 내자시 부정(內資寺副正)에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 봉렬대부(奉列大夫)로 올랐다. 1511(중종 6)년에 일본 사신(日本使臣) 중 붕중(棚中)이 내방(來訪)하여 김안국을 선위사(宣慰使)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붕중을 예(禮)로 접대하여 체면을 얻었고 또 수창(酬唱)한 시가 많아서 풍부하고 민첩하기가 끝이 없었다.

붕중(弸中)은 크게 감탄하여 말하기를 “제가 이웃나라에 내방한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는데, 공(公)만한 인물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후 일본 사신이 오면 반드시 김안국의 안부를 물었으며, 1512(중종 7)년에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올랐다.

그런데 그해에 일본에서 붕중이 또 왔으므로 김안국에게 다시 선위사가 되라는 명이 내렸는데, 홍문관(弘文館)이 아뢰기를 “상(上)께서 지금 주역(周易)을 강론하고 계시므로 김안국은 내보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 불러들이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붕중이 함께 있기를 빌어 마지않자 상(上)이 허락하였으니 당시 김안국에 대한 붕중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김안국은 1513(중종 8)년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왕명으로 적전(籍田)을 개량(改量)하기 위하여 개성에 갔다.

1515(중종 10)년에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가 되었으며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언사(言事)로 체직(遞職)되었으며 그 이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김안국은 1516(중종 11)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이어서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는데 그해에 단종(端宗)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상소(上疏)하였다.

여기서 김안국이 일반 백성들의 경제생활(經濟生活)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 하나의 계기가 있었으니 구체적으로 1517(중종 12)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제수(除授)받으면서 비롯되었다. ​김안국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赴任)한 이후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권하고 농서언해(農書諺解), 정속언해(正俗諺解) 등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위한 한글판 언해서(諺解書)를 간행(刊行)하였으며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는 데에 도움을 줄 벽온방(辟瘟方), 창진방(瘡疹方) 등의 의서(醫書)들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필자는 특히 성리학자(性理學者)였던 김안국이 의서(醫書)들을 간행하였던 점을 주목하고 싶은데 이는 그만큼 모재(慕齋)가 의학(醫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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