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본 칼럼에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수제자(首弟子)로서 개혁정책(改革政策)을 추진했으며,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이라는 영예로운 벼슬을 역임했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생애(生涯)를 고찰(考察)한다.

의성김문(義城金門)이 배출한 김안국은 성리학(性理學)뿐만 아니라 의학(醫學)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본격적으로 모재의 생애를 소개한다.

김안국은 고려시대 수사공(守司空)의 벼슬을 역임한 김용필(金龍弼)의 10대손으로서 고조부(高祖父)는 우왕 대에 함흥소윤(咸興少尹)을 역임한 김호지(金好智)이고 증조부(曾祖父)는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이른 김통(金統))이며, 조부(祖父)는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했던 김익령(金益齡)이다.

또한 김안국의 부친(父親)은 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을 역임했던 김연(金璉)인데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허지(許芝)의 딸인 양천허씨(陽川許氏)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1478(성종 9)년 8월 6일 경기도 여주군 주촌에서 탄생(誕生)했다.

이와 관련해 허지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著者)로서 조선최고(朝鮮最高)의 명의(名醫)가 된 구암(龜巖) 허준(許浚)의 증조부(曾祖父)가 되는데, 이렇게 본다면 김안국은 허준의 대고모(大姑母)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모재는 구암의 내종숙(內從叔)이 되는 것이다.

허준이 1539(중종 34)년생인데, 김안국이 1543(중종 38)년 세상을 떠날 당시 허준은 5세에 불과하므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못했으나, 성장하면서 내종숙이 되는 김안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이 있으니 허준이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천거(薦擧)로 내의원(內醫院)에 출사(出仕)했다는 점인데, 유희춘이 바로 김안국의 문인(門人)이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안국이 별세(別世)한 이후 허준이 탄생했기에 김안국으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모재의 문인 유희춘이 허준과 교류를 하고 더 나아가서 내의원에 천거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안국의 유년시절(幼年時節)은 어떠했는지 살펴본다면 모재는 타고난 천성(天性)이 영리하고 뛰어나서 7세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12세에 글의 대의(大義)를 관통했으며, 15세에 이르러 경전(經典)과 사서(四書)를 널리 통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김안국에게 시련의 순간이 다가오니 17세에 모친(母親)이 별세했으며, 그로부터 2년 후에 부친(父親)도 별세하면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는데, 그가 예절(禮節)에 맞게 거상(居喪)하는 것과 슬프게 곡읍(哭泣)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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