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조선후기(朝鮮後期) 실학(實學)을 집대성(集大成)한 사암(俟菴)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3대 저서를 포함해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著書)를 후세(後世)에 남겼다.

여기서 정약용의 호(號) 사암과 관련해 언급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그의 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다산(茶山) 이외에 삼미자(三眉子),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苔叟), 문암일인(門巖逸人), 탁옹(籜翁), 열초(洌樵), 균암(筠菴) 등이 있었으며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었다.

본래 다산이란 호는 정약용이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10년 동안 유배생활 하면서 그 지명을 따라 다산이라는 별호(別號)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약용은 1818(순조 18)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마재로 귀향한 이후 사암이라는 호를 사용한 점을 주목한다.

덧붙이면 1822(순조 22)년 정약용이 회갑연(回甲宴)을 맞이하면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묘지명(墓誌銘)에 자세히 남겼는데 묘지명이란 망자(亡者)의 생전행적(生前行跡)을 기록한 글을 일컫는 것이다.

사실 묘지명은 망자(亡子)의 지인(知人)이나 후손(後孫)이 지은 경우가 대부분이나 정약용은 이례적으로 묘지명을 직접 지었던 것인데 이러한 묘지명을 지으면서 호를 사암으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암의 의미는 후세에 성인이 내 책을 본다 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정약용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18년 8월 본보(本報)에 연재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암 정약용 생애 고찰’ 제하의 칼럼에서 사암으로 서술하였는데 본 칼럼에서도 사암으로 통일한다는 점을 밝혀둔다.

한편 정약용의 모친이 해남윤씨(海南尹氏)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인데 해남윤씨의 친사촌 여동생의 남편이 되는 농은(農隱) 강문현(姜文顯)의 6대 조부가 바로 강수곤(姜秀崑)이 된다. 이와 관련해 강수곤의 일화(逸話)가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소개되었다는 점인데 목민심서는 어떠한 책이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서(著書)라 할 수 있는데, 사암이 57세 때인 1818(순조 18)년에 당시 유배지(流配地)였던 강진읍에서 조금 떨어진 다산서옥(茶山書屋)에서 완성하였으며 유배생활(流配生活)에서 해배(解配)된 이후 1821(순조 21)년 마재에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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