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하루 위로한 국밥 한 그릇
‘마이카 시대’로 여가문화 확산
외국인 거주 증가, 음식 세계화

전시장 내부 모습  ⓒ천지일보 2023.11.14.
전시장 내부 모습 ⓒ천지일보 2023.11.14.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오늘은 뭘 먹을까?’

기대와 설렘이 담긴 한마디의 말이다. 우리내 삶 속에는 오래 전부터 외식생활의 문화가 담겨 있었다. 음식에 진심인 한국인들에게 오늘날 외식은 끼니를 떼우기 위한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때로는 비즈니스적이며, 때로는 사람과 소통하고 따뜻한 정을 나누는 자리가 됐다. 최근에는 ‘혼밥’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시대별로 서울의 외식 문화의 변천사를 알아봤다.

전시장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23.11.14.
전시장 안의 모습 ⓒ천지일보 2023.11.14.

◆1950~1970년대, 때부분 끼니형 식사

외식은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이다. 집에서 만들어 먹거나, 외부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단순히 끼니 해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 누구와 먹는가’라는 사회적 관계형성, 유지의 의미도 담고 있다.

13일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인 서울생활사박물관에 따르면,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은 한강 이북, 즉 강북 중심의 도시였다. 서울 사람 대부분은 화이트 칼라(사무직 노동자)이거나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였다. 노동자들은 봉급을 받고 생계를 꾸려가는 샐러리맨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직장에서 점심을 사먹고 퇴근길에 술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당시에는 끼니형 식사 위주였다. 농촌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서울에서 살아남기는 여간 쉬운게 아니었다. 더욱이 적자 생활을 이어가던 노동자들이 자주 먹던 음식은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던 국밥이었다. 오랜 시간 우려낸 따뜻하고 구수한 국물은 고된 하루를 위로하는 서민 음식이었다. 이 당시 식사 메뉴는 설렁탕외에도 해장국, 곰탕, 추어탕 등이 인기였다. 현존하는 설렁탕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이문 설렁탕’이다. 이문동 일대에는 이문이 들어간 상호를 쓰는 식당들이 여럿 존재했다.

대중잡지 ‘별건곤 (1929)’. 경성의 명물 중 하나인 설렁탕을 소개하고 있다. (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대중잡지 ‘별건곤 (1929)’. 경성의 명물 중 하나인 설렁탕을 소개하고 있다. (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1926년 한 언론사에 담긴 ‘설넝탕과 뚝배기’라는 제목의 글에는 ‘빈대가 업는 집이 흉가인 것처롬 설넝탕 안파는 음식뎜은 얼넝얼넝한 음식뎜이다. 설넝탕은 이만큼 일반에게 보편된 음식이다’ 라고 소개됐다.

이 당시 중국집과 분식집도 크게 늘었다. 쌀 부족 해결을 위해 정부는 절미운동과 혼분식장려운동을 실시하면서다. 중국음식점에서는 짜장면·우동·짬뽕과 같은 국수를 많이 판매했다.

◆여가 생활로서의 외식문화

경제발전이 활발한 1970년대부터는 맛을 즐기는 외식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 이 당시 본격적으로 자동차 생산에 돌입한다. 특히 올림픽을 전후해 대량 소비시대가 열리면서 자동차 판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가정마다 개인용 승용차가 생기면서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열리고 여가 문화가 확산된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육류 소비도 본격화됐다.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진데다 고속도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식재료 유통이 원활해지고 국내 식품산업도 발달했다.

고기 음식점도 호황을 누렸다. 특히 정원을 내부에 조성한 식당인 ‘가든형 음식점’이 1970년대 후반 점차 늘어났다. 서울 외국에도 이같은 음식점이 들어섰으며, 양재와 태릉 일대에서는 숲속에서 고기구이집을 차리고 외식을 원하는 손님들을 맞았다.

도심 개발과 함께 ‘먹자골목’도 들어섰다. 1970년말~1980년대 초반 국회의사당 건설과 금융산업 지구가 조성됐고, 인근에는 자연스레 외식 업소가 집중적으로 밀집된 ‘먹자골목’이 생겨났다. 새롭게 떠오른 지역에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 시민들에게 인기가 컸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가구당 월평균 가계 지출이 늘었고 소비 지출도 증가했다. 특히 외식비가 늘어났다. 실제로 서울연구데이터베이스 자료에 따르면, 생활의 기초여건이 되는 항목의 비중은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된 반면, 교육, 교양, 오락비, 교통통신비, 그리고 외식비(기타소비)의 비중이 현격히 증가하고 있다.

선데이서울에 ‘젊은이타운 정보’가 연재된 것 중 관철동의 내용이 담겨 있다(1978) (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선데이서울에 ‘젊은이타운 정보’가 연재된 것 중 관철동의 내용이 담겨 있다(1978) (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식탁 문화

1984년에는 지하철 2호선이 완공됐다. 이로써 강북과 강남이 연결되고 그간 소외된 부도심권이 활성화됐다. 샐러리맨, 노동자,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 골목도 점점 확대됐다. 왕십리 곱창골목, 신림동 순대타운도 처음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서민이 주 고객이었만, 고소하고 쫄깃한 식감이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지하철 2호선을 통해 강남 식객들이 찾아왔다. 1990년대에는 더이상 가족 외식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고 대학생과 직장인, 가족 동반으로 외식의 소비층이 확대됐다.

1990~2020년대 초반까지의 서울은 세계화 시대를 맞이해 외국인들의 거주가 증가했다. 한국인의 외국 관광 체류도 활발해졌다. 서울에서도 외국에 먹던 음식과 음료, 주류를 맛볼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됐다. 건대의 양꼬치 거리도 서울의 세계화 과정에서 생겨난 중국음식점 집중 지역이다.

1980년대 신락원. 동대문구 전농동 한자리에서 영업한 중국음식점의 모습과 1대, 2대 사장의 사진이다(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1980년대 신락원. 동대문구 전농동 한자리에서 영업한 중국음식점의 모습과 1대, 2대 사장의 사진이다(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국민건강영양조사(2019)를 토대로 서울시가 발표한 ‘식생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민 3명 중 1명은 매일 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은 23.5%, 남성은 37.5%로 남성의 외식율이 더 높았다. 특히 12~18세의 절반인 48%가 하루 1회 이상 외식한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현대에서 외식은 식생활에서 중요한 일부가 됐다. 개인의 취향도 다양화해 특색있는 외식문화도 증가했다.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라는 말은 이젠 단순한 인사가 아닌, 식사 이상의 소통과 교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이후 혼밥과 혼술, 나만의 특색있는 음식문화도 자연스러운 외식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한편 이같은 내용을 담은 ‘서울 외식 이야기-오늘 뭐 먹지?’ 전시는 내년 3월 31일까지 서울생활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전시 포스터 (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전시 포스터 (제공: 서울생활사박물관) ⓒ천지일보 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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