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치정(尹致定)은 어려서부터 문재(文才)로 촉망받았으며 1829(순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첫 관직생활(官職生活)을 시작하였다. 1834(순조 34)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로 선임되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고, 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선임되었다.

이듬해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를 책봉할 때 가례도감도청(嘉禮都監都廳)에 선임되어 의식진행에 능력을 인정받고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1845(헌종 11)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고 겨울에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6(헌종 12)년 다시 이조참의를 지내고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1850(철종 1)년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855(철종 6)년 호군(護軍)이 되고 이어서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역임하고 1857(철종 8)년에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상(喪)에는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가 되어 장례를 무사히 마쳤다.

1858(철종 9)년 한성판윤(漢城判尹)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이 되고 1860(철종 11)년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뒤 이듬해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어 북변(北邊)을 순시하고 민정을 보살폈다. 1863(철종 14)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1864(고종 1)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865(고종 2)년 5월 8일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제수받았는데 고종실록(高宗實錄) 기사를 인용한다.

“김수현(金壽鉉)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치정(尹致定)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유치선(兪致善)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심경택(沈敬澤)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박승수(朴昇壽)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덧붙이면 윤치정이 홍문관 제학으로 제수받은 이후 불과 2주가 지나서 향년(享年) 65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였다는 것이다. 윤치정은 생전에 문사(文士)에도 능할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써서 ‘필원록(筆苑錄)’에 올랐으며, 1851(철종 2)년에 간행된 해평윤씨세보(海平尹氏世譜)를 편찬하였다. 마침내 윤치정은 세상을 떠난지 6년후가 되는 1871(고종 8)년에 문청공(文淸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끝으로 본 칼럼에서 윤치정의 생애를 4회에 걸쳐서 연재하였는데 조대비(趙大妃)의 인척(姻戚)으로서 다양한 관직생활(官職生活)을 하였으며 특히 4만 여권의 서적(書籍)을 소장한 장서가(藏書家)였던 그의 생애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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