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최혜인 기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무비자 입국을 전격 허용하기로 했다.
우크라의 대반격과 러의 철통 방어로 전쟁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현 전시상황에서 교전국 국민들을 자유롭게 오가도록 문을 열어놓은 건, ‘하이브리드’ 전쟁이 된 전황 속 푸틴 대통령이 전술 다양화를 통해 우크라이나 힘 빼기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이와 함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정권에 대한 반발심을 잠재우고자 이번 전쟁은 국민을 향한 전쟁이 아니라는 기존 입장을 더욱 굳힌 것이라는 시각도 더해진다.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쟁’이 아닌 지도부 제거를 목표로 한 ‘특별군사작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5일 천지일보가 입수한 러시아 정부 공문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영토 내 우크라이나 국민의 무비자 출입국 허용 등을 담은 연방법 제24조 개정안에 최종 서명했다.
지난 1996년 8월 15일 제정된 연방법 제24조의 이번 개정안에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비자 신청 없이 러시아 연방에 자유롭게 입국하고 떠날 수 있다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한다. 적용 문서로는 우크라이나 일반 여권과 여행 비자, 외교 여권을 비롯해 16세 미만 아동의 경우 출생증명서, 선원과 승무원의 경우 선박·항공기 관련 신분증까지도 허용해놨다.
게다가 2002년 7월 25일자 연방법 제101조에 ‘러시아 연방 내 외국인의 법적 지위’에 관해 규정 틀을 두고 있지만, 우크라 국민은 예외로 두면서 국경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 러시아가 물리적인 전쟁과 함께 여론전, 외교전을 포함한 하이브리드전과 ‘우크라이나 힘 빼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은 천지일보에 “지난 2014년 내전부터 1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으로 전투역량이 많이 소진되면서 전쟁이 하이브리즈 전이자 소모전 형태를 띠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1년간 소위 정예군을 다 잃었고 현재 무기를 다 소진하고 있어 서방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하루도 전투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우크라이나가 총력전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빠르게 수복할 거란 서방의 기대와는 달리 ‘대반격’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교전국 내부에선 ‘이젠 전쟁을 끝내자’라는 목소리가, 외부에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를 노려 내부 민심을 다잡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우리는 열려 있다’라는 메시지를 내보내면서 전란에 지친 교전국 국민까지 이주시키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전쟁이 600여일의 장기전으로 치달으면서 우크라이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해 나라를 떠난 우크라이나 난민의 수는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000만명에 달한다. 세계 각국에서 임시 보호나 유사한 조치를 받는 우크라이나인을 포함하면 총 규모는 1300만명에 이른다는 게 국제사회 관측이다.
전쟁 발발 이후 민간시설이나 군 시설 가릴 것 없이 미사일 공습을 가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역과 국경 인근 러시아 영토 거주 국민들은 전란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서방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전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선 러시아가 전술 다양화를 통해 우크라이나 힘 빼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크렘린궁(대통령실) 측은 이번 우크라이나 국민 무비자 입국 허용에 대해 ‘이주’를 언급하며 우크라이나 국민을 러시아 국민으로 받아들이려는 뜻을 공식화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2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국민에 대해 무비자 입국을 허용키로 한 것을 두고 “러시아에 이주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를 종속된 나라로 보는 러
이처럼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종속된 문화권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 옛날 1100년 전 ‘키예프(우크라이나어로는 키이우) 루스’라는 뿌리가 같다는 점 등이 그 이유다. 실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인 지난해 2월 21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은 같은 키예프 루스에서 나왔을지라도 러시아와는 구성 민족도 달랐고, 독자적 문화·종교를 가지고 있는 독립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역사 문화적 상징적인 키이우(키예프)가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여서 러시아가 아닌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의 종가(宗家)라고 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같이 쓰는 ‘키릴 문자’를 읽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다른 민족 입장에선 언뜻 보기에 같아 보이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다른 것처럼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도 읽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이 같은 한자 문화권이지만 전혀 다른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이와 관련 페트로프스키-슈테른 교수는 우크라이나를 바라보는 러시아의 사관에 대해 “푸틴은 1860년대 러시아 관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어나 우크라이나 국민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는 없기 때문에 주권도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