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상 밧줄 매달아 끌어 내려
보수단체 회원 경찰에 잡혀
“반대 의사 내도 안 들어줘”
시민 “문화 업적 인정해야”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된 상태로 넘어져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된 상태로 넘어져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가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가운데 최근 보수단체에 의해 정율성 흉상이 훼손되면서 지역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흉상을 훼손한 광주의 한 보수단체 회원인 윤영보(56)씨는 현재 재물손괴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상태다.

윤씨는 2.5t의 승합차를 이용해 흉상 목에 밧줄을 매달아 끌어내렸다고 경찰에 자백했다. 그는 보수 유튜브와의 인터뷰에서 “강기정 시장이 시민단체 등에서 정율성 공원 조성 등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출했음에도 들어주지 않아 철거하게 됐다”고 밝혔다.

훼손된 정율성 흉상은 남광주 청년회의소가 중국 해주구 인민정부로부터 기증받은 것으로 청년회의소가 남구로 다시 기증하면서 2009년 7월 양림동 정율성로에 세워졌다.

본지는 지난 3일 광주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를 찾아 넘어진 흉상과 시민들의 반응을 살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돼 수리 중이라는 안내 글과 통제선이 쳐진 모습.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돼 수리 중이라는 안내 글과 통제선이 쳐진 모습. ⓒ천지일보 2023.10.04.

일각에서는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문제가 이념논쟁에 갇혀 지역사회 분열로 가열될 가능성이 있어 광주시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여론이다.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배경

지난 8월부터 국가보훈부, 보훈단체, 시민단체, 정당, 시민들은 해방 이후 정율성의 행보와 관련해 중국 공산당과 북한 노동당을 찬양하고 부역해온 공산주의자 정율성이라고 단죄하고 광주시가 추진하는 정율성을 기념하는 공원 조성 등에 대해 반대해 왔다.

이에 강기정 시장은 지난 8월 28일 정율성 선생 기념사업은 35년 전 노태우 대통령 재임 기간인 1988년 중앙정부에서 먼저 시작했으며 광주시도 이 같은 정부의 기조에 발맞춰 관련 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했다고 밝혔다.

또 2002년부터 5명의 시장이 바뀌는 동안 시민의 의견을 모아 흔들림 없이 진행한 20년 사업으로 처음에는 북방정책의 맥락에서 ‘공산권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이후에는 ‘한중우호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최근에는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사업들이 추진됐다고 전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된 상태로 넘어져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된 상태로 넘어져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시에 따르면 실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은 지난 2004년 학술대회에서 제안돼 2010년 생가고증위원회를 통해 장소가 선정됐다. 2018년 10월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본격 추진돼 토지매입을 완료하는 등 완공을 앞둔 상태다.

강 시장은 특히 “정율성 기념사업 논란을 보며 지난 2013년 박승춘 보훈처장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 파문이 떠오른다”면서 “당시 보훈처는 수십 년간 광주시민이 마음을 담아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금지시켰고 이념의 잣대로 5.18을 묶어 광주를 고립시키려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보훈처의 철 지난 매카시즘(1950년대 미국의 극단적이고 초보수적인 반공주의 선풍)은 통하지 않았고 광주시민은 이를 잘 극복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강 시장은 “오랜 기간 대한민국 정부도 광주시민도 역사 정립을 마친 정율성 선생에 대한 논쟁으로 더 이상의 국론을 분열시키지 말라”며 “특히 보훈단체와 보수단체를 부추겨 광주를 다시 이념의 잣대로 고립시키려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보훈부에 촉구했다.

또한 강 시장은 “광주시민은 지금의 이념 논란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국가와 함께 추진했던 한중 우호사업인 정율성 기념사업을 광주시가 책임지고 당당하게 잘 진행하겠다”고 전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 남구 정율성 거리전시관.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 남구 정율성 거리전시관. ⓒ천지일보 2023.10.04.

◆넘어진 흉상 시민들 “끔찍하다”

흉상이 훼손된 현장에는 남아 있는 탑 몸체 양쪽으로 ‘수리 중’이라는 안내 글과 함께 통제선이 둘려 있었다. 흉상은 대나무밭에 넘어진 상태였으며 얼굴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왼손은 대나무를 꼭 쥔 것처럼 보여 마치 넘어지지 않으려 애쓴 듯한 모습이었다.

정율성 거리를 지나던 김현석(56, 남구, 남)씨는 “아무리 말 못 하는 흉상이지만 직접 보니 너무 섬뜩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씨는 “정율성 선생은 자신뿐 아니라,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했다. 중국에서도 한국의 위상을 알린 인물”이라며 “굳이 흉상을 부수고 과격한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안타깝다”고 분노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 남구 정율성로 벽면에는 ‘동아시아의 예술혼 음악가 ‘정율성’이라고 기록돼있다.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 남구 정율성로 벽면에는 ‘동아시아의 예술혼 음악가 ‘정율성’이라고 기록돼있다. ⓒ천지일보 2023.10.04.

본지가 만난 대부분 광주시민은 “다수의 시민 의견은 생각하지도 않은 불법한 행위”라며 “민주적 토론이 필요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이선숙(52, 남구 봉선동, 여)씨는 “뉴스를 통해 접하고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서 왔다”며 “앞으로 정율성 생가를 비롯해 ‘정율성로’는 유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 남구 정율성로 벽면에는 ‘동아시아의 예술혼 음악가 정율성’이라고 기록돼있다. 이외에도 그의 연보 등 중국에서의 위상에 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영화음악 등 360여곡 작곡

정율성(1914~1976) 선생은 광주 남구 양림동 출생으로 연안송, 팔로행진곡, 독창, 제창, 소합창, 대합창, 동요, 뮤지컬, 오페라, 영화음악 등 360여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록에 따르면 정율성은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상해에서 의열단에 참가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73년 10월 진보 인사들의 항일운동 성지인 연안으로 향했다. 1945년 8월 15일 동아시아의 해방이 찾아오자 한동안 북한에서 거주하며 음악 활동을 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정율성 생가터 앞에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설명이 기록돼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정율성 생가터 앞에 음악가 정율성에 대한 설명이 기록돼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한국전쟁 기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소수민족과 조선족의 음악을 수집, 작곡했다. 1976년 12월 7일 베이징에서 만 6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정치투쟁 속에서도 음악 창작에 전념했던 항일운동가이자 동아시아의 음악을 발전시켰으며 세계 평화의 우의를 실천한 민간 외교가로 추앙받고 있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은 본지와 통화에서 “역사에 대한 소수 의견은 있을 수 있지만 적법한 절차에 의한 행위가 아닌 것은 결국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폭력”이라며 “한중 문화자원으로서 정율성 업적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율성 흉상 강제 철거에 나선 범시민연대는 정율성을 공산주의자로 단정하고 48억원이라는 막대한 혈세가 사용되는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전면 중단·재검토할 것을 시에 촉구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돼 수리 중이라는 안내 글과 통제선이 쳐진 모습.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돼 수리 중이라는 안내 글과 통제선이 쳐진 모습. ⓒ천지일보 2023.10.04.

이들 단체는 지난 2일 입장문을 통해 “정율성 흉상 강제 철거 사태는 결국 강 시장의 오기와 불통이 가져온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범시민연대는 지난달 30일 밤 정율성 흉상을 강제로 철거한 보수단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임한필 공동대표는 “정율성 흉상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철거되지 않고 특정 시민의 물리적인 힘으로 철거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입장을 밝혔다.

시민연대는 지난달 26일 광주시청 정문 앞 잔디광장에서 출범식 및 성명을 발표하고 강기정 광주시장에게 ▲공산 주의자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중단 ▲정율성 관련 문화사업 전면 재검토 ▲공사 중인 정율성 역사공원 대신 대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 실시 등을 요구한 바 있다.

광주시와 보수단체, 범시민연대 등이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과 관련해 서로 반대된 입장을 보이는 가운데 시가 어떠한 방법으로 소수 시민의 반대 목소리를 수용하고 해결해나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된 상태로 넘어져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조성된 흉상이 훼손된 상태로 넘어져 있다. ⓒ천지일보 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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