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지나간 통신사 일행 화원

최북 작품 추정, 안견 이후 유일

종이에 담채, 전통산수화 기법

6폭에 도연명 도화원기 써넣어

최근 서울에서 조선시대 정조(正祖) 때의 ‘무릉도원도’가 처음 발견됐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최근 서울에서 조선시대 정조(正祖) 때의 ‘무릉도원도’가 처음 발견됐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조선시대 세종 때 화원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현재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돼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속에 나타난 무릉도원을 말하고 화가 안견이 그린 조선 유일의 상상화다. 안견 이후 많은 도화서(圖畫署) 화원들이 있었지만 무릉도원을 그린 작가가 없었다.

최근 서울에서 조선시대 정조(正祖) 때의 ‘무릉도원도’가 처음 발견됐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새 풍속화를 찾아 공개한바 있는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이재준 고문(전 충청북도문화재 위원)이 학회 논문(2023.9)을 통해 공개했다.

‘도원량 무릉도원도(陶元亮 武陵桃源圖)’라고 화기를 적고 있는 이 병풍은 지본(紙本) 6폭으로 전통 산수화 기법으로 그렸으며 각 폭의 크기는 40x107㎝이다. 산수풍경이나 등장인물이 중국이 아닌 모두 조선의 전원 풍경이다.

제일 첫 장에는 ‘도원량도원도’란 묵기(默記) 제목이 있으며, 각 면 상단에 도연명(東晉, 365~427)의 '무릉도화원기'를 나눠썼다. 그런데 그림을 그린 작가는 나타나지 않고 화기를 쓴 서사(書士)만 낙관이 찍혀 있다.

화기(畵記)는 정연한 행서(行書)로 세로로 썼으며 첫 머리엔 두인(頭印)으로 방인(方印)과 맨 끝에는 아호(雅號) 인장이 찍혀 있다.

각장의 배면에 부착돼 있는 여러 장의 간찰 배접지로 ‘무릉도원도’를 표구했을 당시 사용된 간찰로 ‘선동(仙洞)’ 이란 글자가 확인되고 있다. 영천 선원리는 경치가 아름다워 예부터 무릉도원 혹은 ‘선원’이라고 불려왔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각장의 배면에 부착돼 있는 여러 장의 간찰 배접지로 ‘무릉도원도’를 표구했을 당시 사용된 간찰로 ‘선동(仙洞)’ 이란 글자가 확인되고 있다. 영천 선원리는 경치가 아름다워 예부터 무릉도원 혹은 ‘선원’이라고 불려왔다.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이 그림이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서 그려진 것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바로 각장의 배면에 부착돼 있는 여러 장의 간찰 배접지로 ‘무릉도원도’를 표구했을 당시 사용된 간찰이다.

조선 인조 때 영천에서 효자로 이름난 박경립이 쓴 간찰은 ‘선동 입납(仙洞 入納)’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밖에도 여러 장의 간찰에서 ‘선동(仙洞)’ 이란 글자가 확인되고 있다. 영천 선원리는 경치가 아름다워 예부터 무릉도원 혹은 ‘선원’이라고 불려왔다.

이 고문은 논문에서 “조선 정조(正祖) 때 도화서 화원이며 김홍도, 이인문과 동시대 활약한 천재 화가 최북(崔北, 1712~1786)의 화풍과 많은 점이 닮아있다”고 전제하며 “점묘법이나 부벽준(斧劈皴), 등장인물, 산수 그림이 최북이 남긴 기풍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고 주장했다.

전서(篆書) 두인(頭印)은 최병익(崔炳翼)이며 낙관은 최병익과 아호로 생각되는 ‘운파(雲坡)’가 찍혀 있다. 그러나 운파는 조선시기 인명사전과 각종 사료 기록이 없다.

최북 석림모옥도(石林茅屋圖)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최북 석림모옥도(石林茅屋圖)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도화서 화원 최북 영정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도화서 화원 최북 영정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9.21.

이 고문은 “그는 조선 중엽 강릉 최씨 원정(遠亭) 최수성(崔壽成)의 후예로 조선 영‧정조 시기 경상북도 영천에 살던 유림들과 교유를 맺고 왕래하던 인물이라는 것만 파악됐다”고 설명했다.

영천은 조선통신들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예부터 장수도역(長水道驛)은 이들이 행장을 점검하고 쉬었다 가는 곳으로 유명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통신사 일행을 보는 것은 장관이었으며 많은 관중들이 몰렸다고 한다.

이 같은 볼거리는 예부터 영천의 자연적인 축제가 됐으며, 이들이 묵었던 장수도역에서는 마상재(馬上才)와 풍악(風樂) 등 성대한 환송 잔치도 큰 볼거리였다. 조선통신사 행렬축제는 지금도 2년에 한번 씩 열린다.

이 고문은 “조선통신사 일행에는 반드시 도화서 화원이 동행했으며 이들은 영천에서 여러 날 묵으면서 지역의 사류(士流)들과 교류했을 것으로 상정된다”며 “무릉도원도는 지역의 유력 토호(土豪)들의 요청으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부연했다.

조선 영‧정조 시기 통신사를 수행한 도화서 화원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이에 이 고문은 “그중 천재 화가로 지칭되는 최북을 지목하는 것은 그림 속의 여러 기법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산수, 인물, 어선, 기암괴석 등의 표현에서 최북의 필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