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서삼릉 ‘효릉’, 조선 12대 왕 인종·인성왕후 능

생후 엿새 만에 어머니는 세상 떠    
계모 문정왕후 핍박에도 효성 다해
세자 24년, 8개월 재위하고 단명
오붓한 모자의 정, 사후에 나눠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고양 서삼릉의 효릉에는 인종과 인성왕후가 묻혀있다. 이웃에 모후(장경왕후)의 희릉이 있으니 조선왕릉 최초로 어머니와 아들부부가 함께 했다. 인종은 단종과 더불어 가장 불쌍한 조선왕이다. 단종은 출생 하루 만에, 인종은 엿새 만에 모후를 잃었다. 6세에 세자가 돼 24년의 모진 세월 끝에 1544년 30살에 왕이 됐다. 인종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과거시험이 아닌 경전과 행실을 보고 논술시험으로 인재선발)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1545년 즉위 7개월 11일만에 세상을 뜨니 최단기재위에 네 번째로 단명한 왕이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과도한 주변의 요구, 계모의 구박과 위협, 중종의 승하와 제사, 건강 악화 등이 죽음을 앞당겼다. “죽거든 부모님 곁에 묻어 달라”고 말하던 애절한 소원에 따라 고양 정릉(중종의 능) 서쪽 언덕에 자리했다. 부인 인성왕후의 능 자리도 미리 조성했다. 그러나 1562년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지금의 정릉으로 파 옮기니 인종은 아버지와 이별하고 말았다. 인성왕후가 1577(선조 10)년 세상을 뜨고 이듬해 인종 옆에 묻히니 효릉은 헌릉(태종·원경왕후) 이후 125년만의 쌍릉으로 조성됐다. 효릉에 얽힌 인종의 애달픈 이야기를 들어본다.

효릉은 인종과 인성왕후의 각자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다. 후릉(제2대 왕 정종·정안왕후)과 헌릉(제3대 왕 태종·원경왕후)에 이어 125년 만에 조성된 쌍릉이다. 인종의 봉분에만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효릉은 인종과 인성왕후의 각자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다. 후릉(제2대 왕 정종·정안왕후)과 헌릉(제3대 왕 태종·원경왕후)에 이어 125년 만에 조성된 쌍릉이다. 인종의 봉분에만 병풍석이 둘러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최고의 왕세자로 평가

인종(이호)은 1515(중종 10)년 2월 25일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장경왕후는 1507년 8월 4일 왕비가 됐으나 자식이 없었다. 1509년 후궁 경빈 박씨가 복성군을, 1511년 숙의 홍씨가 해안군을, 왕비가 첫딸 효혜공주를 낳았다. 왕비의 처지는 난감했다. 왕비 책봉 8년이 지나 1515년 드디어 아들을 낳으니 제12대 인종이었다. 하지만  엿새 후 3월 2일 장경왕후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원자(인종)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원자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했다. 1517년 4월 13일 원자가 3살이 되어 궁에 들러 임금과 대비를 알현했다. 이때 중종이 아들에게 계잠(경계하는 글)을 써 줬다. “오래도록 세자를 두지 못했는데 네가 출생하니, 온 백성이 기뻐하니, 나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너는 천성이 순수하고 총명하여 말을 들으면 반드시 외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느냐? ‘천자문’을 끝내고 ‘유합(한자교본)’을 절반이나 배웠다니, 어찌 보통 아이의 일이겠느냐?”고 했다. 1517년 중종 12년 7월 22일 문정왕후 윤씨를 왕비로 삼으니 교서를 내렸다. 인종은 문정왕후에게서 자랐다. 1520년 4월 22일 6살에 왕세자로 책봉됐으며 2년 후 성균관에 입학하니 차근차근 다음 왕위를 준비했다. 1524년 3월 인종은 한 살 많은 박씨(금성부원군 박용과 의성 김씨의 딸)와 결혼했다. 차기 국왕과 왕비의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효릉의 전경’. 출입이 금지됐던 효릉은 9월 8일 조선왕릉 마지막으로 일반에 개방됐다. 1일 3회 사전 예약을 통해 최대 90명의관람이 가능하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효릉의 전경’. 출입이 금지됐던 효릉은 9월 8일 조선왕릉 마지막으로 일반에 개방됐다. 1일 3회 사전 예약을 통해 최대 90명의관람이 가능하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외척싸움에 ‘외롭고 힘없는 왕’ 돼

그러나 1527(중종 22)년 2월 25일 세자의 12살 생일에 ‘작서(불에 탄 쥐)의 변’이 일어났다.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져 동궁의 북쪽 뜰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동궁(인종)을 저주한 일이었다. 이일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이 함께 쫓겨나 1533년 사사됐다. 궁중에서는 봉성군과 덕흥군 등 중종의 자식들이 계속 태어났고 1531년에는 인종의 하나뿐인 누이 효혜공주가 20살 나이에 단명했다. 1534년 문정왕후가 아들(이환, 경원대군. 훗날 명종)을 낳았다. 정국은 혼란해지고 왕세자의 신변은 위태로웠다. 대윤(윤임, 장경왕후의 동생)과 소윤(윤원형, 문정왕후의 동생)이 파벌을 형성해 권력싸움에 돌입했다. 권신 김안로가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윤원형 일파를 탄핵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1537년 문정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오히려 유배 후 사형을 당했다.  왕세자(인종)와 대군(명종)의 세력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1543(중종 38)년 1월 7일 밤에 왕세자(인종)가 머물고 있는 동궁에서 불이 났다. 왕이 전교하기를 “급히 군사를 출동시켜 불을 끄게 하라”고 했다. 실록은 “이날 밤의 화재는 뜻밖에 발생하였다. 동궁에 달려가 보니 불길이 강하여 자선당까지 불탔다. 그러나 군사는 소란만 떨지 제대로 불을 끄지 못했다”고 했다. 영의정 등이 정원에 묻기를 “세자가 어느 곳에 피했는지 살펴보았는가?”하니, 승지는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마 피하여 대내로 들어갔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과 세자는 대내에 있었다. 왕이 “나와 세자는 함께 무사하다. 다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괴한 일이다”라고 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파벌은 심해졌다. 1543년 2월 23일 대사간 구수담이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패거리)를 세웠다 합니다”라고 고했다. 모두 중종의 외척들이었다. 중종은 난감해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44년 11월 15일 중종이 세상을 떴다. 인종이 왕위에 올랐고 친정을 하고자 이언적, 송인수, 김인후 등의 사림을 등용했다. 또한 사화 때 죽은 조광조, 김정, 기준 등의 신원을 복직시키고 현량과를 다시 시행토록 했다.

정자각 뒤로 왼쪽이 인종,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과비각이 배치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09.11.
정자각 뒤로 왼쪽이 인종,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과비각이 배치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09.11.

◆건강도 삶의 의욕도 잃은 왕

그러나 인종은 효성이 지극해 세자시절부터 직접 중종의 병수발을 들었고 극진한 간호를 다하느라 건강도 나빠졌다. 계모인 문정왕후에게도 효성이 지극했으나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과 함께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데 골몰했다. 문정왕후 일파는 인종이 멀쩡히 왕위에 있는데도 경원대군을 세제로 책봉하자며 인종을 압박하며 왕위를 위협했다. 윤원형은 인종을 저주하기도 했다. 온갖 스트레스로 지친 인종은 왕이 되어 중종의 장례를 치러야했다. 힘든 일이었다. 인종의 묘지 글에는 “중종의 병환이 깊어지니 세자는 먼저 약을 맛보고 왕께 드렸다. 음식을 들지 않아 수척한 모습에 보는 자가 울먹일 정도였다. 중종이 승하하시니 엿새나 미음조차 안 드셨고 다섯 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보다 못한 신료들이 “진찰 받으시라” “산행을 금하시라” “고기를 드시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신하들이 매일 졸라대자 진찰을 받았고 봄이 되면서 건강이 회복돼 일상의 업무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즉위 6개월이 지나 초여름부터 위중해졌고 1545년 6월 26일에서 27일 이틀간 급박한 상황이 전개됐다. 6월 29일 새벽 인종이 기절했다가 다시 살아났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왕은 “내 병세가 더하니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원 대군에게 전위 한다”고 했다. 영의정 등이 임금에게 갔다. 윤인경·유관이 손으로 우러러 어루만져 보니 여윈 뼈가 앙상하여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상이 매우 피곤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이 가빠서 쓰러지려 하자, 윤인경 등이 서둘러 전위문서에 도장을 찍고, 목이 쉬도록 통곡하고서 나왔다.

이날 실록에는 “왕후가 인종의 병이 극도로 위태로워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바치려 하였다. 영의정 등이 눈물을 쏟고는 중궁에게 증세에 보탬이 되지 않다며 멈추게 하였다”라고 했다. 어떻게든 남편을 살려야 한다는 왕후의 애절한 모습이었다. 훗날 인성왕후는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됐고, 1547(명종 2)년 공의왕대비가 됐다. 32년 후 1577(선조 10)년 11월 경복궁에서 64세에 승하했다. 왕후는 선조에게 을사년의 공신을 삭제하고, 윤임·이유 등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요청하고 임종했다.

왕릉에는 봉분의 앞쪽 좌우 각각에 문석인과 무석인이 있고 그 옆에 네 마리의 석마가 서 있다. 석마는 문·무석인의 소유물을 상징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왕릉에는 봉분의 앞쪽 좌우 각각에 문석인과 무석인이 있고 그 옆에 네 마리의 석마가 서 있다. 석마는 문·무석인의 소유물을 상징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죽어서나마 어머니의 사랑에 안겨

7월 1일 묘시(오전 5~7시)에 임금이 청연루 아래 소침(편전에 있는 임금의 거소, 노침은 정전의 거소)에서 세상을 떴다. 실록은 “상의 병이 위독하던 밤에 도성사람들이 밤새 모여 궐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상의 증세를 물었으며,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곡하여 울며 슬퍼하였다”고 했다. 인종은 경기도 고양의 부왕 중종과 어머니 장경왕후의 곁에 묻혔고 효자의 의미를 되새겨 능호를 ‘효릉(孝陵)’으로 했다. 죽어서 부모 곁에 묻히고자 했던 인종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 한 것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문정왕후가 1562년 명종 17년에 중종의 정릉을 현재의 선릉 옆으로 옮기고 인종과 장경왕후는 그대로 남았다. 그럼에도 인종은 생전에 얼굴조차 못 본채 돌아가신 어머니 장경왕후와 사후에 오붓한 모자의 정을 나눌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행복하지 않을까.

봉분 정면을 제외한 옆과 뒤로 석호와 석양 각 4마리가 배치돼 있다. 왕릉의 수호와 음·양의 균형을 잡기 위한 상징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봉분 정면을 제외한 옆과 뒤로 석호와 석양 각 4마리가 배치돼 있다. 왕릉의 수호와 음·양의 균형을 잡기 위한 상징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9.11.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