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391(공양왕 2)년 6월에 이색(李穡)이 다시 함창으로 폄척(貶斥)되었다가 12월에 소환(召還)되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封)해지고, 공신(功臣)의 호(號)는 전과 같았다.

또한 그해 겨울에 또 함창에서 부름을 받고 올라오는데, 문인 권근(權近) 또한 충주(忠州)로 폄척되어 가다가 길에서 이색을 만나 앞서 사람들에게 들은 말을 고하니, 이색이 이르기를 “이것은 속이는 짓이다. 신하의 도리는 오직 임금의 명령대로 따라서 부르면 오고 물리치면 떠나야 한다. 죽음도 피하지 않는 것인데, 왕래하는 것쯤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정(朝廷)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색은 1392(공양왕 3)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폄척되었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는데, 7월 17일에 이성계(李成桂)가 개경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으로 즉위하면서 475년의 고려(高麗)가 종말을 고하면서 새로운 왕조인 조선(朝鮮)을 건국하였다.

이후 이색을 꺼리던 자가 그에게 거짓 죄를 얽어서 극형(極刑)을 가하려고 하므로, 그가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망녕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무복(誣服)을 한단 말인가. 죽어도 곧은 귀신이 되면 또한 혐의로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그러한 소식을 알게 된 이후 이색을 장흥부(長興府)로 옮겨 안치(安置)시켰으며, 그와 동시에 폄척된 사람들도 공을 힘입어 생명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 그런데 8월에 이색의 차남(次男) 이종학(李種學)이 장사(長沙)로 유배(流配)가는 중에 거창 무촌역(茂村驛)에서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색은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결국 10월에 사면을 받아 장흥부에서 해배(解配)되어 한산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 3년 동안 이색은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한산에 머물러 있다가 1395(태조 4)년 5월에 여강(驪江)에서 더위를 식혔으며,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11월에 태조가 사자(使者)를 보내서 이색을 불렀으며, 그를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였다. 이색은 1396(태조 5)년 5월에 여강(驪江)으로 가서 피서(避暑)를 한다고 청하였다가, 7일에 병이 위독해졌다. 이때 어떤 중이 와서 목은(牧隱)에게 불도(佛道)를 말하려고 하자, 그가 손을 내저으면서 말하기를 “사생(死生)의 이치에 대해서 나는 의심이 없다”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작고하니 향년(享年)이 69세였다.

이와 관련해 이색의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태조(太祖)는 음식을 철폐하고 조회를 3일 동안 중지하였으며 사자(使者)를 보내어 치제(致祭)와 부증(賻贈)을 내려서 예장(禮葬)을 하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10월에 목은(牧隱)의 아들 종선(種善) 등이 영구(靈柩)를 받들고 한주(韓州)로 돌아와서 11월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끝으로 고려(高麗)의 충신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별세(別世)한지 어느 덧 627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의 고귀(高貴)한 생애(生涯)가 우리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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