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사비로 이도한 성왕시기 추정

삼산관, 보살황제 자처한 양 무제도 써

국제학술회의에 한‧중‧일 학자 등 참석

새로 발견된 백제 금동보살입상 측면상(좌)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상호(우) ⓒ천지일보 2023.08.16.
새로 발견된 백제 금동보살입상 측면상(좌)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상호(우) ⓒ천지일보 2023.08.16.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본지 단독으로 지난 2022년 9월 19일자로 보도된 세운미술관 소장의 백제 ‘금동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은 국제 학술세미나 토론에서 모두 국보급으로 확인됐다. 두 점의 불상은 아름답고 숭고한 상호를 지녔으며 각부 조각이 뛰어나고 백제와 교류가 많았던 남조 양나라와 북제 불상의 영향이 확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주최로 1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학 국제 학술세미나에서 중점 논의됐다.

이날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은 발표 논문에서 “금동보살입상의 경우 백제 성왕(聖王) 대 남조인 양(梁)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제작된 귀중한 유물이란 점에서도 백제금동불상 연구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고문은 “금동보살입상은 미소년 같은 아름다운 상호, 비교적 큰 얼굴과 손발의 표현, 여원시무외인의 수인, 특이한 삼산형의 보관, X자형으로 교차된 경식의 표현과 팔에 걸친 천의 아래로 내려온 태조(太彫)의 상의(裳衣) 표현은 삼국시대 백제 불상에 나타나는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금동보살입상의 크기는 고 23㎝, 대좌고 6㎝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반가사유상(크기 13㎝, 대좌고 4.5㎝)의 경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 국보 78호)과 가장 많이 닮은 비례를 보여줘 같은 시기 한 장인의 솜씨가 아닌지 추정했다.

돈황석굴 북위 보살상의 보관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8.16.
돈황석굴 북위 보살상의 보관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8.16.
북제 업성 출토 석제 반가사유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8.16.
북제 업성 출토 석제 반가사유상 (제공: 이재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고문) ⓒ천지일보 2023.08.16.

이 고문은 “백제 금동보살상에서 처음 조사되는 삼산형(三山形) 보관(寶冠)은 양나라 성도 유적에서 출토된 무제(武帝) 집정 시기 금동삼존불 협시불, 성도 서안로에서 출토된 제(齊) 영명(永明) 8(490)년명 석조 삼존불의 협시 보살상, 북제 보살상의 보관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또 고구려 무용총 벽화나 북위제 보살상, 양나라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있는 백제 사신의 머리에 쓴 관을 닮았으며 당시 귀인들이 일상에서 쓴 모자형태로 해석했다.

이날 토론자로 참석한 일본 구마모토현 야츠시로 박물관의 이시하라 히로시 연구원은 “금동보살입상은 같은 형태의 유물이 일본에도 있으며 진품으로 판단된다”며 “반가사유상은 평면적인 얼굴, 영락(瓔珞)의 모양, 무릎 위에서 교차하는 천의(天衣) 표현 등으로 보아 한국 국보 78호와 공통점이 많으며 일본 야추지(野中寺) 소장 7세기 후반 하꾸오 시대 소작의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박상일 전 청주대 교수(고대사, 연변대 박사)도 “금동반가사유상의 동색 녹소와 양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불상이 틀림없으며 국적을 판단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금동보살상의 경우 얼굴 모습이 다소 경직된 느낌이며 부여 군수리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비교해 보면 같은 시대이거나 약간 후대로 보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발표에서 이재준 고문은 “양 무제는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칭하고 동태사에 들어가 평소 즐겨 사용한 관이 소박한 직물로 만든 삼산관이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 보살상이 성왕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 아닌지 추정했다”면서 “고대에는 ‘제왕즉불(帝王卽佛)’로 여겨 실제 모습을 불상으로 제작한 일이 많았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한편 이날 함께 공개된 금동제 반가사유상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국보 83호)의 축소판이며 보관(寶冠)이나 경식(頸飾), 자세, 릴리프(부조, 평면상에 형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조형기법)가 강한 의문(衣文, 옷주름)의 조각 수법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 7세기 중반 북제의 영항을 받은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고문은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相好)”라고 지적하며 “이 불상은 원만하고 후덕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흐르며 충남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의 넉넉함을 지니고 있어 위덕왕 시기 북제와의 교류로 얻어진 유물일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중국 북제 유적인 업성 출토의 백석제 반가사유상과 비교되며 위덕왕 시기 서해를 통해 미륵하생 신앙의 유입을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백제는 성왕시기 남조 양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다. 무제(武帝)를 위한 주 대통사의 창건을 위시해 왕도 사비 이전과 관련해 불교성국을 완성하려 했다. 이 시기 왕도 사비에는 양나라 수도에 있는 정림사를 본 뜬 왕찰을 건립했으며 많은 사찰이 지어졌다.

또한 일본에 불교를 전하면서 많은 금동제 불교유물을 전해줬으며 5세기 중반 일본에 전해진 백제 불교의 유풍은 아스카(飛鳥), 하꾸오(白鳳)시대를 거쳐 나라(奈良) 시대까지 영향을 줬다.

한편 이날 정세운 고배과학감정원장은 두 불상에 대한 과학감정인 비파괴 검사 결과를 발표하며 “공인기관에서 시료채취로 검측한 성분 결과가 똑같이 나왔다”며 “앞으로는 고대 유물의 경우 안목감정에서 과학감정이 동시에 이뤄지는 감정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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