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막내린 아랍의 봄
이집트·튀니지·시리아 ‘도루묵’
홍콩·이란서는 민주진영 숙청
“민주 시위 간격 점점 짧아져”

[이스탄불=AP/뉴시스] 작년 10월 17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이란 영사관 밖에서 이란 여성들이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고 있다.
[이스탄불=AP/뉴시스] 작년 10월 17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이란 영사관 밖에서 이란 여성들이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고 있다.

[천지일보=이솜 기자] 2013년 7월 3일,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민주주의 바람을 몰고 왔던 아랍의 봄이 끝났다. 군사 쿠데타가 모하메드 무르시 당시 이집트 대통령을 축출하면서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아랍의 봄’ 발원지인 튀니지부터 정치적 혼란이 거세다. 작년 이란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도 잠잠해졌지만 정부가 시위대를 잡아들이고 있어 그 공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랍권뿐만 아니다. 최근 민주화를 시도했던 국가들은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숙청의 시간’을 갖고 있다.

최근 홍콩 경찰은 3년 전 민주화 시위 후 해외로 망명한 민주화 운동가 8명에게 총 13억원이 넘는 현상금을 내걸었다. 미얀마에서는 민주 진영의 아웅 산 수치 국가고문이 지난달 교도소 독방에서 78번째 생일을 맞았으며 군부가 여전히 반대 세력을 유혈 진압 중이다.

◆민주진영 신뢰 잃고 독재자 외교무대 복귀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대중 시위로 독재정권은 열흘 만에 무너졌고 몇 주 만에 시위는 북아프리카 전역과 더 넓은 아랍 세계로 확산했다.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바레인, 시리아, 예멘, 심지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의 억압적인 왕조 정권이 시위대의 함성에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2년 뒤 이집트에서는 이를 무산시킨 쿠데타가 발생했고 권위주의가 다시 복귀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이후 각국에서 아랍의 봄은 인구, 역사, 권력 등 다양한 이유로 실패했다. 그 대가를 치른 것은 아랍 민간인들이었다.

특히 아랍의 봄의 요람인 튀니지는 위기를 맞았다. 튀니지는 아랍의 봄 기간 권위주의 통치자를 전복하고 민주주의를 구축했던 유일한 국가였다.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의 철권통치 속에서 주요 야당 지도자이자 아랍의 봄을 주도했던 라흐드 가누치를 비롯한 정치적 반대자들이 최근 체포됐다.

내부 상황은 복잡하다. 2011년 이후 집권한 정치인들도 경제 상황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실패하면서 새로운 정부 형태는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2012년에는 튀니지 국민의 70%가 민주주의를 지지했으나 2014년에는 48%만이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중동 연구소의 인티사르 파키르는 지난 4월 BBC에 “(튀니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경제 성장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며 “그렇지 않자 그들은 ‘민주주의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2019년 사이에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튀니지는 권위주의 시절로 회귀했다. 그는 튀니지가 10년간 쌓아온 민주주의를 1년 만에 무너뜨렸다. 사이에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의회를 중단했으며 헌법을 다시 썼다.

최근 몇 달 동안 그는 언론인, 노동조합 및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해 자신의 통치에 대한 비판의 조짐이 보이면 단속에 나섰다. 국민의 상실감은 컸다. 작년 12월 치러진 총선의 투표율은 8.8%에 그쳤다. 서방도 사이에드 대통령을 너무 강하게 압박하면 러시아와 중국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우려로 비교적 가볍게 다뤄왔다는 지적을 받는다.

2019년 4월 수단에서 민주화혁명의 상징이 된 여성인 알라 살라(22)가 연설하는 모습. (출처: 트위터)
2019년 4월 수단에서 민주화혁명의 상징이 된 여성인 알라 살라(22)가 연설하는 모습. (출처: 트위터)

수단은 2019년 여성이 주축이 된 1년 간의 시위로 20년간 지속된 오마르 알-바시르 독재 정권이 종식되면서 민주화 물결에 대한 희망이 커졌다.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흰색 옷을 입은 채 차 위에 서서 자유를 외쳤던 22세의 여성 알라 살라는 민주화 혁명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바시르의 축출을 도왔던 두 군벌 간 무력 분쟁이 석 달 가까이 지속되면서 희망의 불씨는 꺼져가고 있다. 이 분쟁으로 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만명이 수도를 탈출했다.

지난 5월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아랍연맹 정상회의에 참석하면서 공식적으로 국제 외교무대에 복귀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내전이 발발하자 반정부 시위대를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관측소에 따르면 내전으로 인한 누적 사망자는 50만명에 달한다.

시사 매거진 디 아틀란틱(The Atlantic)에 따르면 최근 아사드를 만난 아랍 관리들은 그가 (내전 학살을) 후회하거나 타협할 의지가 전혀 없음을 밝혔다고 전했다.

◆이란 시위대 수십명에 사형 선고

2019년 거센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던 홍콩에서도 민주 진영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홍콩 공영방송 RTHK 등에 따르면 친중 진영이 장악한 홍콩 입법회(의회)는 지난 6일 전체 의석의 95%에 달했던 구의회 직선 의석을 19%로 대폭 줄인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총 470개 의석 중 유권자는 19%만 뽑을 수 있는 셈이다.

이는 2020년 6월 국가보안법 시행에 이어 ‘애국자에 의한 홍콩 통치’를 기조로 진행된 선거제 개편의 마무리 단계다. ‘애국자’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민주 진영의 선거 참여는 불가능할뿐더러 시민의 투표권까지 사라진 상황이다.

이와 함께 홍콩 경찰은 해외로 망명한 민주화 인사 8명을 체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준다면 1인당 100만 홍콩달러(약 1억 7천만원)어치의 현상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4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평화 시위와 시민불복종운동(CDM)이 벌어진 미얀마의 상황도 악화일로다. 수치 전 국가고문은 군부에 19개 혐의로 기소돼 작년 총 33년 형을 받았으며 그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은 해산됐다. 군부의 유혈 진압 속에서도 민주 진영 임시정부인 국민통합정부(NUG)는 시민방위군(PDF)을 조직해 저항하고 있다.

[이들리브=AP/뉴시스] 지난 3월 15일(현지시간) 시리아 이들리브에 반정부 봉기 12주년을 맞아 시리아인들이 모여 춤추고 있다. 2011년 3월 15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독재에 맞선 시리아판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이들리브=AP/뉴시스] 지난 3월 15일(현지시간) 시리아 이들리브에 반정부 봉기 12주년을 맞아 시리아인들이 모여 춤추고 있다. 2011년 3월 15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독재에 맞선 시리아판 '아랍의 봄'이 일어났다.

지난 5일 유엔 인권이사회(UNHRC)는 이란 당국에 평화 시위대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과 이들에 대한 처형, 대규모 체포 및 구금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히잡을 느슨하게 썼다’는 이유로 작년 9월 경찰에 체포됐다가 살해된 마흐사 아미니(22) 사건으로 이란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발했다.

시위는 한때 이란 정권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다다랐으나 이란 보안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당국의 정치적 탄압으로 동력을 잃었다. 시위 진압 중 최소 537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시위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마땅한 인물이나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지 않았던 점도 시위 실패의 요인으로 지목된다.

시위가 사그라들자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인권단체 이란휴먼라이츠(IHR)는 올해 6월 30일까지 354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돼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6%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번 시위와 관련해서는 최소 26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수십명이 사형당할 수 있는 범죄 혐의로 기소되거나 재판을 받고 있다.

시위 후 독립국제조사단은 최근 “이란의 상황은 계속 악화하고 있다. 체포와 구금, 성폭력, 강제 실종, 시위대의 사망에 대한 보고가 계속 접수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대다수 나라와 지역의 민주화 운동이 빛을 보진 못했지만 희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언론인이자 작가인 킴 가타스는 지난 4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이란 시위의 동력이 사라진 데 대해 “지금은 전 세계 시위 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썰물과 밀물의 주기”라며 “이란에서는 시위의 급증과 감소 사이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민주화의 주역을 청년으로 꼽으며 이란 국민의 60%가 30세 미만임을 덧붙였다. 가타스는 이란의 핵심 권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고 다른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4년 1월에는 대만 총통 선거가, 5월에는 튀니지 대통령 선거가 열릴 예정이다.

가타스는 “다음 불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