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모든 LG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객가치를 모아 고객의 삶을 바꾸는 감동과 경험을 만들어 가자.” 이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한 말이다. 구 회장의 말과 같이 LG그룹은 ‘고객 중심’을 핵심가치로 둔 기업이다. 이는 구인회 창업주의 기업정신과도 맞물려 있다. 구인회 창업주가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를 설립한 이래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며 지금의 LG그룹이 있기까지의 스토리를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LG전자에서 근무했던 박광수 칼럼니스트를 통해 파헤쳐본다.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전자 등에서 40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기업경영 컨설턴트, 기업초빙강의 전문가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연암 구인회 집안은 이씨 조선시대부터 대대로 벼슬을 지낸 전통 문인 집안으로서 구인회 회장의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아명은 정득(丁淂), 호는 연암(燕巖)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출신으로 부친 구재서와 모친 진양하씨(晉陽河氏)의 6남(구인회, 구철회, 구정회,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1929년 함께 살아가는 마을의 허만식의 딸 허을수와 결혼해 구자경 등 6남(구자승: 전 LG상사 회장, 구자학: 아워홈 회장, 구자두: LB인베스먼트 회장, 구자일: 일양화학 회장, 구자극: 엑사이엔씨 회장) 4녀의 다복한 자녀를 두었다.

손자는 고 구본무(LG회장), 구본능(희성그룹 회장), 구본준(LG고문), 구본식(LT그룹 회장)과 손녀 구훤미, 구미정을 둔다. 현재는 양자로 입적시킨 증손자 구광모(LG회장)와 증손녀 구연경, 구연수를 둔다.

구인회 회장은 홍문관 시독관(侍讀官)으로 있던 조부 구연호(具然鎬) 문하에서 그 당시 학문인 한학을 공부하다가 지수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해 3학년에 중퇴하고, 서울 소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2년 만에 졸업한다.

원래 구씨 집안은 경상남도에서 부자 집안으로 머슴들을 비롯해 대가족이 살아왔으나, 가족 구성원들 간에 우애와 화목함이 몸에 배어 있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따뜻한 집안이었고, 근검절약하면서 생활을 했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근검절약 철학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됐으며,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이어져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 이상으로 검소한 생활을 한 분으로 알려진다.

연암은 서울에 거주할 당시 자가용 대신 승합버스나 전차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급한 일 발생 시는 부득이하게 택시를 이용할 정도였고, 숙박도 호텔이 아닌 동생 집에서 해결했다. 짧은 거리는 건강관리를 위해 여유를 두고 걸어서 다니면서 신사업을 구상했다.

1969년 12월 31일 6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하고 1970년 1월 9일 장남인 구자경 회장에게 가업을 승계한다. 연암은 생전에 구두쇠로서 재벌기업가 출신이 아닌 서민처럼 대단한 검소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 유명하다.

연암이 사업(화장품, 치약 등)으로 크게 성공한 뒤 고향인 진주를 방문한 적 있었다. 당시 진주가 낳은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이 방문했다며 지역 유지들이 모여 구 회장을 환영하며 맞이했다. 구 회장은 이들과 차 한잔하며 다방의 계산대로 가서 본인의 찻값을 낸다.

그런데 다방 종업원이 잔돈이 없다며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당시 거스름돈은 5원, 그 5원 거스름돈을 받기 위해 구 회장과 함께 온 지역 유지들과 공무원들이 함께 다방을 나가기 위해 다방 계산대 앞에 있던 구 회장 뒤로 줄을 늘어서 서 있을 정도였다.

당시 지역 유지들은 “대기업 총수 회장이 그깟 잔돈 5원을 받으려고 그 많은 사람을 뒤에 줄을 서게 해서 초청인 모두를 기다리게 하다니 기가 막힌 일”이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한 사람은 이 모습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는데 입을 너무 크게 벌린 나머지 순간적으로 닫히지 않아서 병원에서 응급처방을 받고서야 입을 닫을 수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람들이 길게 줄 선 모습을 본 구 회장은 좀 겸연쩍었는지 빙그레 웃기만 하고 끝까지 5원을 받아서 나갔다. 이 일화가 입방아를 타면서 구 회장은 구두쇠 회장으로 유명해졌다.

같이 근무를 했던 당시의 임직원이 왜 이토록 돈을 아끼는지 궁금해서 질문을 하자 연암은 본인이 돈을 아껴야 소속사 임직원들 모두가 돈을 아끼는 검소한 생활을 할 것이고, 이게 토대가 돼서 튼튼한 회사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경영 철학을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정신은 2대 아들 구자경 회장에서부터 3대 손자 구본무 회장을 거쳐 4대 증손자 구광모 회장까지 이어져 간다.

구 회장은 임원진과 점심식사 시 소공동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해결하면서, 참석한 임원진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검소한 생활철학을 몸소 실천한 구두쇠 철학의 기업인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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