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무역전쟁 이미 시작
中 “안보 영향” 마이크론 제재
美 “韓, 그 공백 메우면 안돼”
한국의 반도체 최대고객 중국
미중 전쟁에 ‘양자택일’ 떠밀려

미국-중국 간 무역전쟁.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3.05.25.
미국-중국 간 무역전쟁.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3.05.25.

[천지일보=최혜인 기자] 세계 경제 규모 1·2위인 미국과 중국 간 총성 없는 ‘무역전쟁’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이후로 더욱 격화되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이 뭉쳐 중국·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준을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리자 중국도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에 대한 구매 중지 제재에 나서면서 패권 대결로 치닫는 양상이다. 미-중 갈등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공룡들 간 전쟁에 끼어있는 한국은 그 사이에서 강대국들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가 됐다.

앞서 중국은 G7 정상회담이 폐막하던 지난 21일 서방의 제재에 즉각 대응하듯 미국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해 자국 내 구매 중지조치를 내렸다.

이날 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은 “조사결과 마이크론 제품에는 중국 정보 인프라 공급망에 중대한 보안위험을 초래하는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위험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보안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관련 법규에 따라 중국의 주요 정보인프라 운영자는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중단해야 한다”고 공시했다.

이에 미국도 대응에 나섰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희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24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중국 정부의 마이크론에 대한 발표는 터무니없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백악관은 이번 제재가 불러올 반도체 시장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동맹·우방과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미 공화당 소속 마이크 갤러거 미국 하원 ‘미국과 중국공산당의 전략적 경쟁에 관한 특별위원회(중국특위)’ 위원장은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마이크론의 공백을 메우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놨다. 미국이 한국에 미국편 들 것을 요구하자 한국은 반도체 전쟁 틈바구니에서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미 “반도체 슈퍼파워 되찾겠다”

미국 대표 기업 제재에 나선 중국의 반응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국이 작심하고 지구촌 반도체 생태계 주도권을 되찾겠다며 동맹국과 우방국들을 결집, 대응에 나서는 상황을 보면 더욱 그렇다.

마이크론 로고 [출처: 로이터 통신,  연합뉴스)
마이크론 로고 [출처: 로이터 통신,  연합뉴스)

중국과 무역전쟁을 이어온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미 행정부가 모든 산업의 기초인 에너지와 광물자원, 반도체 등의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구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외신 보도 등을 종합하면 미국은 유럽과 한국·일본·대만·인도 등 파트너들과 함께 당근과도 같은 ‘반도체 인센티브’를 놓고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 북미에서는 캐나다와 청정에너지 공급과 중산층 일자리 창출에 합의했고 일본과도 핵심 광물 공급망 협력을 심화하기로 했다.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기조는 최근 사례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 2월 말 조지타운에서 ‘반도체과학법(CSA)과 미국 기술 리더십의 장기비전’을 주제로 연설하면서 “2030년까지 수십만개의 일자리를 되찾고 미국이 최첨단 반도체 생산거점이 되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미국은 1990년 세계 반도체 칩의 37%를 생산했지만 현재는 고작 12%에 불과하다”면서 “첨단 반도체는 더 심각하다. 한때 세계 수요의 거의 전부를 생산했으나 지금은 생산량이 제로(0)다. 대만이 첨단 반도체의 92%를 생산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만의 첨단 반도체 산업기술은 UC버클리대가 연방정부 지원을 받아 개발한 기술”이라며 “미국이 첨단기술의 연구 중심과 반도체 ‘슈퍼파워’ 자리를 되찾겠다고 공식화했다.

특히 그는 “2001년 30만명에 이르던 미국 반도체업계 노동자의 1/3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 사이 세계 반도체 시장은 3배가 넘게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미국을 위한 칩(Chip for America)’을 내세우며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도 장담했다.

◆“이대론 한국·대만 피해 불가피”

하지만 미국이 다시 반도체 종주국 자리를 되찾으면 과거 치킨 게임이라는 끝장 대결을 거쳐 힘들게 반도체 강국으로 자리 잡은 한국과 대만 등의 나라들은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그간 모든 교역 상대국들이 미국 중심의 통상질서로 인해 늘어난 비용을 떠안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미국이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생각이 비슷한 나라(like minded nations, LMN)’ ‘규칙기반의 국제질서’ 등의 정치·외교적 수사(rhetoric)로 치장하고 구슬려 왔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이에 이번에도 패권 다툼에서 발생하는 ‘전쟁 비용’은 결국 고스란히 한국을 비롯한 우방과 동맹국들에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가운데 존 커비 미국 NSC 전략소통조정관이 25일 오전(현지시간) 워싱턴DC 한국기자단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2023.4.25 (출처: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가운데 존 커비 미국 NSC 전략소통조정관이 25일 오전(현지시간) 워싱턴DC 한국기자단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2023.4.25 (출처: 연합뉴스)

이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 창업자의 발표를 봐도 알 수 있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지난 3월 타이완 수도 타이베이에서 열린 포럼에서 “반도체 생산기지를 미국으로 옮긴다면 비용이 두 배로 늘어나는 반면, 전화기와 자동차 등 다른 제품에 반도체를 사용하는 속도가 늦춰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 공장 착공식에서도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거의 죽었다”며 “그 죽음을 아쉬워할 이유는 별로 없지만, 그에 따른 비용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고 밝혔다. 전문가 분석에 따르면 반도체 파운드리 세계 1위 기업인 TSMC는 미국 공장의 비용상승 탓에 대만 공장생산 제품에 비해 20~30% 가격을 올려야 한다.

◆자국 이익 최우선하는 바이든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미국이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으로 반도체공장을 끌어들이는 점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내놨다.

당시 코트니 LA타임스 기자는 “(미국 반도체공장 유치가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를 막아)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에 해를 끼친다. 미국 선거를 겨냥한 국내 정치로 핵심 동맹국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내 제조업과 일자리를 늘리는 게 나의 욕망이지만 중국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가 앞서 “한국 기업들의 미국투자는 한국 내 일자리도 늘린다. 그래서 저는 윈-윈(win-win)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한 데 이어서다.

이에 미국민들에겐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투자가 미국 일자리를 늘린다”고 유권자들에게 어필한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의 반도체 최대 고객인 중국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발언하면서 동맹국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국 이익만 도모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청한 국내 한 경제전문가는 본지 인터뷰에서 ‘투자와 일자리는 모두 제로섬 게임’이라고 전제하면서 “미국에 투자하고 나면 그만큼 자국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든다”며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미국 중산층의 일자리를 늘려주고 나면 그만큼 자국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중 갈등 격화에 시험대 선 韓

중국 제재에 있어서만큼은 같은 목소리를 내온 미 공화당은 현재 지난 2월 ‘스파이 풍선’ 위기 당시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에 대한 제재와 수출 통제를 보류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본격적으로 따져 물을 태세다.

공화당 소속 마이클 매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24일(워싱턴 현지시간) “중국에 대한 제재와 수출 통제 보류 관련 정보를 국무부에 요청하는 공문 서신을 안토니 브링컨(Antony Blinken) 장관에게 보냈다”고 밝혔다.

이 서신에서 매콜 위원장은 국무부가 중국 관리에 대한 인권 관련 제재, 화웨이를 대상으로 한 수출 통제 및 기타 경쟁적 조치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고 악시오스가 이날 전했다. 그는 “중국의 침략에 국방부는 계속 나약하고 수동적으로 대응해 심각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며 “점증하는 중국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행정부 부처 지도자들의 의지와 능력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미-중 무역전쟁이 정치·외교적 상황과 맞물려 강대강 대치로 치달으면서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둬야 하는 한국이 우방국들이 또다시 시험대에 선 모양새다. 최근 중국 정부가 이미 수년 전부터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축소하고 한국 업체나 자국 제품을 구매해온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 반도체 등 첨단산업 육성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20일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시찰을 마친 후 연설하고 있는 모습(왼쪽)과 반도체 웨이퍼. (출처: 뉴시스, 게티이미지뱅크)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 반도체 등 첨단산업 육성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5월 20일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시찰을 마친 후 연설하고 있는 모습(왼쪽)과 반도체 웨이퍼. (뉴시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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