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대우는 다시 한 번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하남의 동백산(桐柏山)을 파서 여러 갈래의 물길을 만들었다. 회수가 두 갈래로 나누어 흐르게 됐다. 하나는 사수(泗水), 다른 하나는 기수(沂水)로 모두 산동을 경유한다. 회수도 위세를 줄이고 순한 양으로 변했다. 장강은 화하문명 발상의 주류였다. 오랜 역사를 지닌 이 늙은 용은 너무 거칠어서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대우는 직접 사천성 민산(岷山)으로 갔다. 강을 파서 흐름을 돌리자, 장강의 물은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지금의 성도(成都) 비강(郫江)으로 양주(梁州)로 흘러간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호북성 강릉(江陵)인 형주(荊州)로 흘러간다. 두 물은 동정호(洞庭湖)를 지나 한수(漢水)에서 만난 후 파양호(鄱陽湖)를 거쳐 다시 장강으로 흘러갔다가 곧장 바다로 돌아간다. 삼협(三峽)의 거리는 700여리이다. 절벽을 깎아낸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사람이 결국 하늘을 극복하자, 장강이라는 오만한 용도 복종하고 말았다.

대우의 성공은 물의 성질을 이해하고, 자연에 순응한 덕분이다. 홍수에게 여러 곳으로 흘러갈 자유를 준 셈이다.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흘러간 물은 이제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유익한 삶의 재료로 변했다. 그것이 대우의 공이다. 물의 흐름에 따라 소용이 없었던 땅도 삶의 터전으로 변화됐다. 그것은 대우의 탁월한 지혜와 각고의 노력이 빚은 결과였다. 대우의 치수는 청사에 영원히 남았다. 성공의 배후에는 천추에 빛날 불멸의 정신이 있었다. 그는 직접 도구를 들고 인부들보다 앞장섰다. 오랜 시간을 소택지에서 보내고 나니 허벅지에는 살이 없었고, 정강이에는 털이 다 빠져버렸다. 허리는 누구나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 눈을 돌릴 정도로 굽었다. 후대 사람들은 낙타처럼 허리가 굽은 사람이 걷는 모습을 우보(禹步)라고 불렀다. 그는 하루종일 분주했다. 나뭇가지에 모자가 걸려도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신발이 진흙탕에 빠져도 뒤적이지 못했다. 세 번이나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리지 않았다.

결혼한 지 3일 만에 대우가 집을 떠나자, 아내 도산씨(涂山氏)는 아들을 업고 산에 올라가 남편이 있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시간이 흘러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초의 남방가요로 알려진 오인가(俣人歌)는 대우의 부인이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는 30세가 넘어서 절강성 소흥(紹興)에서 소도씨 여교(女嬌)를 아내로 맞이했다. 원래 그는 치수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평생 아내를 얻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치수사업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자기 생전에 끝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늙기 전에 아들을 얻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여교와 결혼한 셈이다. 홍수와의 싸움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니 뒷일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자기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아들이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우는 치수에 전력을 다했다. 남루한 옷과 조악한 음식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음악도 들리지 않았고, 절세미인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의적(儀狄)이라는 부하가 있었다. 그가 우연히 쌀과 물을 이용해 술을 만들었다. 절묘한 향기와 맛이 나자, 그것을 호로병에 넣어 대우에게 드렸다. 대우는 그것이 입에 맞아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마셨다. 의적도 기분이 좋았다. 대우가 깨어나면 반드시 몇 마디라도 칭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깨어난 대우의 첫마디는 이후로 다시는 술을 만들지 말라는 지시였다. 대우는 의적을 멀리했다. 각 씨족의 선주민들은 대우의 인격에 감동했다. 동쪽에 절적(絶迹)을 만들고, 서쪽에 돌을 쌓았다. 남쪽에서 적안(赤岸)을 넘고, 북쪽에서 새곡(塞谷)을 지났다. 30년이 지나자, 유명한 하천 300개를 다스리고, 지류 3000개를 관개했다. 작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깊은 연못에서 이무기를 쫓아내고, 범람하는 홍수의 항복을 받았다. 선주민들은 산과 동굴에서 나와 평원과 구릉으로 돌아왔다. 일순간에 화하의 들판에 봉황이 깃들고, 난조가 둥지를 틀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