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관광 도시 개발 일환으로
1973년 발굴해 유물 대거 출토
국내 과학적 발굴 시초로 평가

1973년 천마도 장니 출토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3.05.02.
1973년 천마도 장니 출토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3.05.02.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1973년 7월 27일. 여름내 가뭄이 계속돼 민심마저 흉흉하던 그날, 갑자기 컴컴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폭우가 퍼붓기 시작했다. 경북 경주시 황남동 155호분 발굴 현장에서 금관 상자를 꺼내 올리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암흑천지가 되고 천둥·번개까지 ‘우르릉 쾅쾅’하며 내리친다. 혼비백산한 조사원과 인부들은 금관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줄행랑을 쳤다. 잠시 후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화창해졌고, 조사원은 다시 현장으로 올라가 금관 상자를 들고 내려왔다.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상부 봉토조사(서측) (출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지일보 2023.05.02.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상부 봉토조사(서측) (출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지일보 2023.05.02.

신라를 대표하는 왕릉급 무덤인 ‘천마총(天馬冢)’이 발굴된 지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1973년 4월 6일 첫 삽을 뜨기 시작해 12월까지 발굴이 이어졌다. 출토 유물은 1만여점에 달했다.

특히 천마도(天馬圖) 장니(障泥,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린 판) 출토 덕분에 155호분은 ‘천마총’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이에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아 발굴 당시의 상황과 성과를 재조명하고 역사적 가치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사전조사(외형실측)(출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지일보 2023.05.02.
천마총 발굴조사의 기록-사전조사(외형실측)(출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지일보 2023.05.02.

◆천마총 5~6세기 축조 추정

‘천마총’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덧널을 넣은 뒤 그 위를 돌로 덮고 다시 흙을 씌어 만든 무덤이다. 천마총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름 약 47m, 높이 12.7m로 비교적 큰 무덤이다. 무덤의 확실한 주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왕 또는 왕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마총 발굴 조사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찬란한 문화를 자랑한 옛 신라인 경주를 관광 도시로 개발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경주를 방문해 진행 상황을 보고받는 등 큰 관심을 뒀다.

천마총 전경 ⓒ천지일보 DB
천마총 전경 ⓒ천지일보 DB

사실 초기 계획은 천마총 옆에 있는 가장 큰 고분인 제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복원해 내부를 공개하는 것이었다. 황남대총은 경주뿐 아니라 국내를 통틀어 가장 큰 고분이었기에 역대급의 유물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을 잇댄 쌍무덤으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높이 22.2m(남분)·23m(북분)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발굴 기술도 미진했고, 발굴 조사를 위한 경험도 턱없이 부족해 바로 옆에 있는 천마총을 먼저 시범적으로 발굴했다.

천마총 금관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천지일보 2023.05.02.
천마총 금관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천지일보 2023.05.02.

◆금귀걸이 등 1만여점 출토

1973년 4월 6일 조사단은 제155호분(천마총) 발굴을 위한 첫 삽을 떴다. 그런데 발굴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기대를 넘어서는 유물들이 대량 출토된 것이다. 금귀걸이를 시작으로 금제 허리띠와 금동신발 등 출토 유물만 1만 1526점에 달했다.

특히 광복 이후 처음으로 신라 금관이 출토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금관 제작연대는 대략 5∼6세기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금관 주인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지증왕(신라 제22대 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장품 상자에서 뜻밖의 유물도 발견됐다. 말이 달릴 때 흙이 튀지 않도록 하는 장니가 출토된 것이다. 장니는 자작나무껍질을 여러 겹 덧대 제작됐는데, 그 위에 순백의 천마(天馬)가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물은 무덤 안에서 썩지 않고 1500년을 버텨내 마침내 부활했다.

그밖에 서조도(瑞鳥圖, 상서로운 새 그림)와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말을 탄 사람 그림)가 함께 출토됐다. 이후 천마도와 금관 등 주요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천마총은 발굴 당시 모습을 재현한 채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천마도 장니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3.05.02.
천마도 장니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 2023.05.02.

◆천마총 발굴 역사적 평가

당시 천마총의 발굴은 세계가 주목할 만한 한국 고고학 발굴의 대사건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천마총 발굴 2년 전인 1971년 무령왕릉(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 발굴이 진행됐지만, 17시간 만에 끝나버렸다. 조사단의 경험과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너무 급하게 이뤄져 기록 등도 제대로 남지 않았다.

이와 달리 천마총 발굴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주도해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졌다. 이에 천마총 발굴은 과학적 발굴의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또 우리나라 고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아 천마총을 재조명하고 신라 문화의 가치를 확산하기 위한 연중 행사를 진행한다. 지난달 좌담회를 시작으로 오는 4일 천마총 비전 선포식, 천마도 장니 실물 공개 특별전 등 다채로운 행사를 진행한다.

문화재청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천마총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다 함께 되돌아보고 미래 00년 신라 문화의 가치 확산과 향유를 위한 메시지를 국민 참여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해 나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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