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료제공: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이재준 고문 

사명당 진적 중 가장 큰 작품

성보로 귀중하게 보존됐으면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1660년경

동화사 사명당 진영(보물 제1505호) ⓒ천지일보 2023.04.25.
동화사 사명당 진영(보물 제1505호) ⓒ천지일보 2023.04.25.

임진전쟁 호국대성으로 숭앙되는 사명대사 유정(1544∼1610). 대사의 서도(書道) 진적(眞跡)은 매우 희귀하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에서 진묵이라고 불리는 유묵들이 국내 전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기도 했다. 일본식으로 장정 표구된 글씨들을 살펴보면 후대에 이모(移模)한 작품들이 많다.

그런데 이번에 국내 한 소장가로부터 나온 글씨는 당(唐)대 시인 이군옥(李群玉)의 시 ‘야우정장관(雨夜呈长官)’을 차용해 쓴 행초 유묵 1점이다. 연륜이 나타나는 장지에 먹으로 썼으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사명대사의 유묵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사명대사 개인의 불교적 인식과 서예적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16·17세기 조선 서예사 및 한·일 문화교류사 연구의 사료로써 활용될 수 있다. 다음 글은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이재준 고문의 학술보고서(2022.4)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작품개요
공개된 작품은 당(唐) 이군옥(李君玉)의 시 ‘야우정장관(雨夜呈长官, 장지에 묵서. 크기 43㎝x96㎝)’을 원문 그대로 적은 것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사명당의 진적(眞跡, 손수 쓴 글씨) 중 가장 크다. 이미 일본에서 알려져 현재 동국대학교에 기증돼 소장되고 있는 작품과 같은 내용이다. 일본에서 찾아진 작품은 여러 언론에 소개됐으나 이번에 조사된 유묵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사명대사는 이 시를 자주 쓴 것일까.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로 발견된 사명대사의 초행서 시고. 당(唐) 이군옥(李君玉)의 시 ‘야우정장관(雨夜呈长官)’을 차용해 쓴 행초 ⓒ천지일보 2023.04.25.
새로 발견된 사명대사의 초행서 시고. 당(唐) 이군옥(李君玉)의 시 ‘야우정장관(雨夜呈长官)’을 차용해 쓴 행초 ⓒ천지일보 2023.04.25.

遠客坐長夜(원객좌장야) 멀리서 온 나그네 긴 밤 앉아 새우네
雨聲孤寺秋(우성고사추) 외로운 절에서 빗소리 듣는 가을 밤
請量東海水(청량동해수) 동해바다 물과 깊이를 재어볼까나
看取淺深愁(간취천심수) 내 수심과 어느 것이 얕고 깊은지를

시의 내용은 비 오는 밤 외로운 산사(山寺)에 앉은 나그네는 무엇인지 모를 수심에 젖어있다. 어찌나 깊은 걱정인지 동해바다 물보다 많고 깊다고 한다. 사명대사가 일본군에게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 송환을 꾀하면서 가슴 속에 가득한 심려를 나타낸 것이다. ‘야우정장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远客坐长夜,雨声孤寺秋. 请量东海水, 看取浅深愁. 愁穷重于山, 终年压人头. 朱颜与芳景, 暗赴东波流. 鳞翼思风水, 青云方阻修, 孤灯冷素艳, 虫响寒房幽. 借问陶渊明, 何物号忘忧. 无因一酩酊, 高枕万情’ (中國 百度 全唐诗库, 秋鲜网. 020)

이군옥은 예주(澧州, 지금의 湖南) 사람으로 자는 문산(文山)이다. 성격이 광달(曠達)했고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시명(詩名)이 있었으며 음악과 서예에도 뛰어나 문학과 풍류로 일세를 풍미했다. 진사시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자 바로 낙향해 안빈자적(安貧自適)한 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활을 시로 노래했다. 사명당은 이군옥의 시를 좋아했으며 일본에 가서도 이 시를 적어 승려들에게 준 것이다.

사명대사 초행서 고대 명필 서체 비교도 ⓒ천지일보 2023.04.25.
사명대사 초행서 고대 명필 서체 비교도 ⓒ천지일보 2023.04.25.

◆ 일본 발견 사명당 초서와의 비교
지난 2015년 국내 언론에 공개된 유묵 한 점은 재일동포 사학자 신기수(辛基秀, 2002년 작고)씨가 생전에 수집한 ‘신기수 컬렉션(140여점)’ 중 한 점으로 그의 미망인이 소유하고 있다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자형과 필획이 전환되는 부분과 연결 서선 또한 모나고 곧으며 대사의 인장, 종이, 먹색, 포장비단이 한데 어우러져 작품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일본에서 들여져 온 글씨는 작은 종이에다 급히 적은 듯한 인상의 초서로 ‘聲(성)’자 등 일부 글자에서 사명당의 운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조사한 초행서 시는 국내에서 두꺼운 장지에다 크기도 훨씬 크게 쓴 것이다. 사명당의 간찰에 보이는 행초서체 운필이 같다.

특히 새로 조사된 작품은 호방한 글씨에다 필세(筆勢)는 거침이 없다. 광초(狂草) 기백이 엿보인다. 진대 명필 왕희지(王羲之)부터 당나라 명필 지영(智永), 송대 휘종(徽宗) 조길(趙佶)을 위시한 황정경(黃庭堅), 미부(米芾) 등 역대 최고의 글씨를 학습한 기운이 완연하다. 이 유묵으로 보아 사명당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예에 정진했나를 알려준다.

사명대사는 승문에 입적한 후 여러 사암을 돌아다니며 수학하면서 많은 명필 선현들의 글씨를 연마했음을 알려준다. 임진전쟁 이전 조선 지식인들의 선망과 취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글씨에서는 의병을 인솔해 평양성 탈환에 성공한 승병장 사명당의 조국애와 힘찬 의기가 느껴지고 있다.

이 유묵은 당송(唐宋) 시를 즐겨 읽은 사명당이 국내에서 쓴 것으로 보이며 낙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인에게 증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명대사 초서(일본 소장) ⓒ천지일보 2023.04.25.
사명대사 초서(일본 소장) ⓒ천지일보 2023.04.25.
사명당 유정 말총종이. 민간 소장의 사명대사 초서 간찰(이번에 찾은 필치와 같다). ⓒ천지일보 2023.04.25.
사명당 유정 말총종이. 민간 소장의 사명대사 초서 간찰(이번에 찾은 필치와 같다). ⓒ천지일보 2023.04.25.

◆ 사명당 서예 초서의 재평가
그동안 호국대성 사명대사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작품 대부분이 일본에 있다고 알려진 데 기인한다. 그러나 최근 언론계에서 사명당의 진적 초서에 대한 보도가 잇따른 데다 전시회 등을 가져 활기를 찾은 인상이다.

초서는 조선 전기의 서예사에 있어 명대(明代) 서풍의 수용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분야다. 15세기 이래 조선 전기에는 조맹부의 송설체를 비롯한 원대(元代) 서풍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특히 해서와 행서에 있어 송설체의 영향은 더욱 그러했다. 이에 비해 초서에서는 송설체의 영향이 소자(小字) 정도에 미쳤을 뿐이며, 그것도 왕희지(王羲之)를 위시한 고전적 초서풍의 지속적 흐름을 막지 못했다.

당대의 석학 명필이 사명대사의 묵적에 관해 놀라운 평가를 하고 있다. 즉 뇌묵당 처영스님과 교산 허균은 사명을 가리켜 “오히려 서산대사보다 뛰어났으며 시문도 달관의 경지를 보였다”고 인품을 평가했다. 사명당은 글씨에도 일가를 이뤘으며 서애 유성룡은 그가 “진초를 잘해 총림 중에 뛰어났다”고 했고, 그의 글씨를 아껴 소장하려는 이가 많다고 극찬했다.

불교계에서도 조선 선조 때 고승 부휴(浮休.善修)의 글씨와 함께 2대 명필로 평가하고 있다. 또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청천 신유한(靑泉 申維翰.1681~1752)은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의 입에 이름이 전해 내려오며 필적이 보물처럼 간직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사명대사뿐일 것”이라고 전했다.

사명대사의 존호도 조선 서예사에 수록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명당의 초서는 웅휘하며 속박되지 않은 데다 끝없는 연마로 역대 명필들의 유풍을 따르고 있다. 사명대사의 진적이 별로 없는 국내 형편에서 단비 같은 수확으로 평가되며 중요한 성보로 귀중하게 보존됐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한편 한국역사유적연구원이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뢰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사명당의 초행서 진적 한지 연도는 1660년(58.3%)경으로 나왔다.

- 정리 백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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