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639(인조 17)년 9세에 남원에서 서울로 다시 온 박세채(朴世采)는 11세에 부친(父親)인 박의(朴漪)에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배우면서 ‘성학집요(聖學輯要)’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집(文集) 등을 읽었다. 그런데 박세채가 14세가 되는 1644(인조 22)년 박의(朴漪)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구체적으로 박세채는 이미 숙부(叔父)인 박유(朴濰)의 양자(養子)로 출계(出系)하였으나 그의 친형(親兄)인 박세래(朴世來)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형 대신 다시 돌아와 가계(家系)를 잇게 되었다. 박세채는 부친(父親)의 3년상을 치르는 가운데서도 여러 경전(經典)은 물론 ‘좌전(左傳)’ 등 제가(諸家)의 문장(文章)을 섭렵(涉獵)하였다.

한편 박세채는 1646(인조 24)년 16세에 잠야(潛冶) 박지계(朴知誡)의 문인(門人)이었던 원두추(元斗樞)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이어서 1648(인조 26)년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合格)하고 그 이듬해에 성균관(成均館)에 입학(入學)하였다.

1650(효종 1)년 봄, 박세채를 비롯하여 성균관 유생(儒生)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묘 종사(文廟從祀)를 요청하고 이를 반대한 영남인(嶺南人) 유직(柳稷) 등에게 부황(付黃)의 벌(罰)을 실시하자 효종(孝宗)이 이들의 벌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박세채는 이에 상소(上疏)하여 조정(朝廷)에서 지휘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엄교(嚴敎)를 받고 과거시험(科擧試驗)을 포기하고 학문(學問)에 전념하였으니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1651(효종 2)년 남계(南溪)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학문적(學問的)인 교류(交流)를 하였다.

1659(효종 10)년 박세채는 천거(薦擧)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으며 5월에 효종(孝宗)이 승하(昇遐)한 이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服喪問題)가 거론되었을 때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南人系)의 대비복제설(大妃服制說)을 반대하고 송시열과 송준길이 주장한 기년설(諅年說)을 찬성(贊成)하여 관철(貫徹)시켰다.

이와 관련해 박세채는 1660(현종 1)년에 ‘복제사의(服制私議)’를 저술하였는데 당시 ‘예학(禮學)의 대가(大家)’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못지않게 예학에 조예(造詣)가 깊었던 남계의 예학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 시기(時期)를 전후하여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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