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 전쟁 420일
尹, 첫 무기 지원 가능성 열어
‘무기 제공 금지’ 원칙 깨지나

러는 “전쟁 개입 간주” 경고
“러, 韓 자본 제재 시작할 듯”
“국익 우선 균형외교 펼쳐야”

지난 18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로이터와 인터뷰하는 윤석열 대통령(출처: 연합뉴스)
지난 18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로이터와 인터뷰하는 윤석열 대통령(출처: 연합뉴스)

[천지일보=최혜인 기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420일째인 지난 19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이 외신과 인터뷰에서 조건부지만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 가능성을 열어놓자, 한국의 러시아 전문가들이 국익에 대한 각종 우려를 내놓고 있다. 30년 가까이 대통령이 방문한 적 없던 우크라이나와 달리 일찍이 2008년부터 한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여러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해왔던 러시아와 척을 지는 게 얼마나 국익에 도움이 되겠냐는 우려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를 두둔할 필요도 없지만 말 한마디에 국익 수조원이 오갈 만큼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는 외교의 세계에서 국익과 가치가 균형을 이루는 외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더해진다. 여기에 일제 강제동원 해법부터 미국 정보당국의 도·감청 논란에 대한 대응 방식까지, 지지율 하락 속 커지는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까지 나온다.

앞서 윤 대통령은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국제법과 국내법에 따라 불법적으로 침략당한 국가를 방어하고 복구하기 위한 지원의 범위에는 한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열어놨다. 또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 학살, 심각한 전쟁법 위반과 같이 국제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면, 우리가 인도주의적 또는 재정적 지원만 주장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러시아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실)은 즉각 대응에 나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어떠한 무기 제공도 반러시아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와 함께 정부가 ‘무기 직접지원 금지 규정’을 뒤엎고 사실상 정책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등 논란이 커지자 한국 대통령실은 “인터뷰에서 ‘민간인 학살’ 등 조건부 군사지원 방침을 밝힌 것인데, 너무 과잉 반응하는 것 아니냐”면서 “인터뷰를 정확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고 사실상 이를 반박했다.

◆미 방문 앞두고 나온 무기 지원 발언

그간 우크라이나와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대해 한국이 무기를 지원하도록 압박해 왔으나 한국은 국내 규정상 이를 거절해 왔다. 우리나라가 전쟁 중인 국가에 살상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전(前) 주러시아 공사인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은 19일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유출된 기밀문서에서 드러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윤석열 대통령이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과 ‘전쟁 범죄’ 등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해 무기 지원 의지를 밝힌 것은 오는 26일 미국 방문을 앞두고 (무기지원) 정책을 바꾸면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정부가 한국 국민에게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미리 분위기 조성에 나서는 것으로 본다. 윤 대통령 방미 때나 귀국 후 지금 이야기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조금씩 미국의 압력에 끌려가면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대열에 합류하는 수순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가치 외교’ 운운하며 우크라이나 사태로 빚어진 반러시아적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단 장기적인 안목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러시아와 관계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부차 탈환 1주년' 하루 전인 3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 북서쪽 부차의 이름 없는 무덤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있다. 지난해 2월 개전 후 러시아군에 한 달 이상 점령당했다가 우크라이나군이 탈환한 도시 부차에서는 400구 이상의 민간인 시신이 발견됐다. (출처: 연합뉴스)
'부차 탈환 1주년' 하루 전인 3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 북서쪽 부차의 이름 없는 무덤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걸려있다. 지난해 2월 개전 후 러시아군에 한 달 이상 점령당했다가 우크라이나군이 탈환한 도시 부차에서는 400구 이상의 민간인 시신이 발견됐다. (출처: 연합뉴스)

이번 윤 대통령 발언은 ‘북한의 러시아 지원설’도 고려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이번 발언을 빌미로 러시아와 북한이 살상 무기와 필요한 물자를 주고받는 등 이들 국가에 이전보다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명분이 주어졌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박 소장은 ‘지금 러시아를 돕기 위해 돈바스 쪽으로 가는 북한군’이라는 최근 러시아 매체의 보도를 거론하며 “북한이 저러는데 ‘우리가 미국을 도와 무기를 지원한다고 해서 문제 삼을 수 있겠는가’라는 식으로 정부의 자기합리화 구실이 될 수도 있다”며 “북한군이 실제로 (파병)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합리화 구실로는 충분하다”고 부연했다.

◆‘민간인 학살’ 언급에 부차 학살 조명

윤 대통령이 언급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학살’과 관련, 지난해 4월 발생한 우크라이나 부차의 민간인 집단 사망 사건이 또다시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부차 학살은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역 특별군사작전 이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의 소도시 부차를 점령하던 중 300여명에 달하는 시민들 시신이 발견된 사건을 말한다. 같은 해 4월 1일 러시아군이 부차에서 철수하고 우크라이나 측이 해당 도시를 탈환한 뒤 내부의 실상이 사진과 영상 등으로 확인되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부차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면서도 러시아의 유엔 차원의 진상조사에는 응하지 않았다.

박 소장은 언론을 통해 러시아가 주범이라고 퍼진 것과 달리 아직 주체가 누구인지 의혹이 남아 있는 ‘부차 지역 학살 사건’을 두고 “앞으로 부차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윤 대통령이 가정한 상황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해영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도 19일 스푸트니크를 통해 “이번에는 실종 군인을 이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이미 하르키우에서 연출하다 실패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제2의 부차 학살을 조작한다면 헤르손 지역 말고는 그런 자작극 연출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이날 박 소장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와 서방 언론들이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한 러시아는 유엔 차원에서 ‘부차 학살’ 사망자들의 명단 공개를 요구해왔다. 당시 러시아 매체들은 사건이 알려질 당시 전사한 군인들 시체에 민간인들의 사복을 입히는 장면이 포착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학살 피해 민간인들의 명단을 국제사회에 공개하면 ‘부차’의 진실이 저절로 밝혀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 이해영 교수는 “러시아가 계속 모른 척할 순 없으니까 이젠 개입할 것”이라며 “(러시아가) 원래 미러링(서방이 전쟁을 일으킬 때 내세운 명분을 똑같이 내세우는 것)이 나름 원칙이니 강한 경고와 일정한 실행프로그램 작동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예측했다. 이어 구체적으로 “러시아가 이미 투자하고 있는 한국 자본이 묶여 있으니, 우선 낮은 수준에서 (제재를) 시작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경고 나선 러, 무기 지원 발표한 美

러시아 외무부는 20일(현지시간)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할 경우 러시아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재차 경고했다.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가능성을 열어둔 것과 관련해 “우리는 무기가 어디에서 왔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은 적대적인 반러시아 행위로 간주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무기 지원) 조치는 해당 국가와의 양자 관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해당 국가의 근본적인 안보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서도 고려될 수 있으며 한국의 경우엔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접근법에 관한 것일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반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대외원조법’을 통해 최대 3억 2500만 달러의 국방 물품과 서비스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안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달 26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방문한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7일 보도했다. 윤 대통령의 국빈 미국 방문이 성사되면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12년만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윤 대통령과 바이든 미 대통령. (출처: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달 26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방문한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7일 보도했다. 윤 대통령의 국빈 미국 방문이 성사되면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12년만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윤 대통령과 바이든 미 대통령. (출처: 연합뉴스)

한편 러시아 국방부는 이날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방향에서 19일 하루 우크라이나군의 총 손실은 군인 380명과 장비 19대에 이른다”고 밝혔다. 또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 돌격대가 아르티모프스크(바흐무트)시를 위해 계속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3개 지역을 추가로 장악하고 도시 북부와 남부 외곽을 봉쇄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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