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본 칼럼에 소개하는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는 17세기 조선(朝鮮)의 관인(官人), 유자(儒者)로서 숙종(肅宗) 대(代)에 당파(黨派)를 초월(超越)하여 능력(能力)에 따라 인재(人材)를 등용(登用)하자는 탕평론(蕩平論)을 최초(最初)로 주장(主張)하였다.

박세채는 1695(숙종 21)년 향년(享年) 65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생애(生涯)를 12회에 걸쳐서 소개(紹介)한다.

박세채의 본관(本貫)은 반남(潘南)이며, 자(字)는 화숙(和叔)으로서 1631(인조 9)년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 창동(倉洞)에서 교리(校理)를 역임(歷任)하였던 중봉(仲峰) 박의(朴漪)와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 2남 1녀 중 차남(次男)으로 탄생(誕生)하였는데, 그의 모친(母親)은 영의정(領議政)으로서 조선(朝鮮)의 4대 문장가(文章家) 중의 일원(一員)으로 명성(名聲)이 있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딸이었다.

이와 관련해 박세채는 고려말(高麗末)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공민왕(恭愍王) 대(代)에 과거시험(科擧試驗)에 급제(及第)하여 우문관(右文館)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던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의 10대손이었다. 덧붙이면 박상충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은 태종(太宗) 대의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서 관직(官職)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고조부(高祖父) 야천(冶川) 박소(朴紹)는 중종(中宗) 대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具現)하려고 하였으나, 사간(司諫)으로 재임(在任) 중에 김안로(金安老)를 탄핵(彈劾)하려다가 오히려 좌천(左遷)되어 파직(罷職)되었다. 결국 낙향(落鄕)하여 가야산(伽倻山)에서 은거(隱居)하며 여생(餘生)을 마쳤는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강공(文康公)이었다.

증조부(曾祖父)는 졸헌(拙軒) 박응복(朴應福)으로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조부(祖父)인 오창(梧窓) 박동량(朴東亮)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였다. 1608(선조 41)년 선조가 승하(昇遐)하기 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유교(遺敎) 7신(七臣) 중의 1인이었다.

이어서 부친(父親)은 서두(序頭)에서 소개(紹介)한 바와 같이 중봉(仲峰) 박의(朴漪)인데, 그는 특히 붕당(朋黨)의 폐단(弊端)을 극론(極論)하고 붕당 단위(單位)의 출척(黜陟)을 비판(批判)하였는데, 박세채(朴世采)가 탕평론(蕩平論)에 깊은 관심을 보인 배경에 부친(父親)의 성향(性向)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덧붙이면 그의 백부(伯父) 분서(汾西) 박미(朴瀰)는 선조(宣祖)의 5녀로서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소생(所生)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婚姻)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封)해졌으니 남계는 이러한 명문가(名文家)의 후손(後孫)으로 탄생(誕生)하였다.

그러나 박세채가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숙부(叔父) 박유(朴濰)의 양자(養子)로 출계(出系)하였으며 불과 5세라는 어린 연령(年齡)에 생모(生母)가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고 그는 양모(養母)가 되는 한양조씨(漢陽趙氏)에 의하여 양육(養育)되었다.

그런데 박세채가 6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 조선의 치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는데 그는 양모인 조씨와 함께 남해의 섬으로 피난(避難)갔다가, 이듬해에 호남의 남원 비봉단 아래에 옮겨 살았다.

이와 관련해 서울에서 탄생한 박세채가 어린 시절을 남해를 거쳐 호남의 남원에서 거주하였던 점이 흥미롭게 느껴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7세라는 어린 연령에 “19사략(十九史略)”을 배웠다는 사실을 주목하며 9세가 되는 1639(인조 17)년에 남원에서 다시 서울로 귀경(歸京)하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