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골의노’현… 정연한 석축도 남아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퇴미산 고구려식 성벽의 흔적
퇴미산 고구려식 성벽의 흔적

 

‘골의내’는 마한 고리국인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는 속칭 ‘퇴미산’이 있다. 퇴미산이란 흔히 토성의 유구를 가리키는 데 퇴미산을 등산해 본 사람이면 이 유적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 산성은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다. 퇴락한 고성 퇴미산성이 왜 중요할까.

그런데 이 산성이 소재한 남양주 옛 풍양현은 <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 속현조를 보면 고구려 시대 ‘골의노(骨衣奴)’라고 불렸다고 한다. 풍양현. 주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

구려 골의노현이다. 신라에서 황양(黃壤)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풍덕(豐德)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 시켰다가 뒤에 포천에다 예속시켰는데 본조 세종 원년에 본 현에 내속하였다.

고려 중기 <파한집>을 쓴 이인로는 이곳을 지나면서 그윽한 경치에 반했다. 이인로의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으로 초명(初名)은 득옥(得玉)이다.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한 학자이면서 서화와 글씨에 능했다. 이인로는 1170년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절에 들어갔다가 뒤에 환속했다.

<파한집>에는 “내가 일찍이 수거사(睡居士)의 묵죽을 배워서 종이나 비단으로 만든 병풍 또는 가리개를 보면 휘둘러 그리지 않은 적이 없어 비슷한 경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시를 짓고, 남은 먹으로 푸른 대나무를 그리고 나니, 아마도 전생에 문동(文童)이 아니었을까 하고 웃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인로는 풍양현을 무릉도원에 비유했다.

봉우리 밑 인가(人家)는 양삭(陽朔, 시월 보름) 경계와 같고

구름 속 개 닭 소리는 무릉도원인가

사군(使君, 고을 사또)이 황우패(黃牛佩, 도둑질)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보리이삭 일렁이는 것을 좋아한다.

골의노현 풍양을 알려주는 '대동여지도'
골의노현 풍양을 알려주는 '대동여지도'

골의노를 백제 이름이라고 기록한 문헌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 현이었다고 적시한 글도 있다. 고(故) 이병도 박사와 충남대 박순발 교수 등이 양주를 마한 54소국 중의 하나인 ‘고리국(古離國)’으로 비정한 바 있다.

고리국의 ‘고(古)’는 중국 고대음이 ‘kuo’, 북경음이 ‘ku’이다. ‘리(離)’는 중국 고대음이 ‘ljie’, 북경음이 ‘li’이다. 고리(古離)’와 ‘골의(骨衣)’는 음이 서로 일치하는 데 근거를 두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리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으로 3세기까지 독자적으로 존속하다가 백제에 점령되었다는 주장이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골의노’를 고구려의 언어로 방위에서 ‘중앙’을 나타내는 의미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즉 계루, 골의=누를(黃)이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한자식 표기인 황양(黃壤, 풍양현으로 바뀐 것은 고려 태조 23년)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경기도 일원이 다 그렇듯 5세기 후반 이 일대는 백제에서 고구려 지배로 바뀌었다. 신라도 고구려 위세에 눌려 눈치를 보느라 소백산 죽령을 넘지 못했다. 왕도 위례성을 지배한 고구려의 강대한 세력은 남하하면서 마한, 백제 구토를 복속했던 것이다. 경기도 일원의 많은 고대 현(縣) 치소들이 <동국여지승람>에 고구려 지명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언어연구(박문사 발행, 2011, 전 고려대 교수 정광 저)> 등 고대어 연구 논문을 통해 고구려 지명의 변화를 참고자료로 소개한다.

川, 水 : 買 매>물>南川 = 南買, 水城 = 買忽, 述川 = 省知買

山 : 達 닥>dag= 터키어> (釜山 = 高達山, 松活達, 熊閃山 = 功木達 등)

城 : 忽 콭>khoto = 몽고어 (水城 = 買忽, 水谷城 = 買旦忽, 漢城 = 漢忽)

壤 : 內, 惱, 奴 뉘>누리? (黃壤=骨衣奴, 斧壤 =於斯內, 休壤 = 金惱, 黑壤= 今勿奴)

田 : 波 바>밭 (麻田淺縣 = 泥沙波忽)

谷 : 旦, 頓 단, 돈>(水谷城 = 買旦忽, 十谷縣 = 德頓忽, 翌谷 = 於支呑)

池 : 內米 뇌메>못 (池城 = 內米忽)

巖 : 波衣 바위>바위 (鵂巖郡 = 租波衣 등)

提 : 吐 토>둑 (大提 = 柰吐, 長提 = 主夫吐)

海 : 波旦 바닿>바다 (海曲 = 波旦, 海利 = 波利)

峯 : 述爾 수리>봉우리? (峯城 = 述爾忽)

岐 : 冬斯 동사 (岐城 = 冬斯忽)

孔 : 濟次 제차 (孔巖 = 濟次波衣) -서울 강서구 한강 공암

沙 : 內乙 뇌이>뉘 = 쌀알에 들어간 모래 (沙川 = 內乙買)

土 : 息 싥, 힑>흙 (土山 = 息達)

판축으로 된 토성 유구
판축으로 된 토성 유구

퇴미는 백제토성인가

한자 ‘퇴(堆)’자는 ‘쌓다’를 뜻한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와 소리를 나타내는 새 추(隹)가 합쳐진 형성자이다. ‘미’는 뫼를 가리키며 산을 뜻한다. 그러니까 퇴미는 토산(土山)이란 뜻이다. 전국에는 ‘퇴미’라는 지명이 많이 있다. 나지막한 야산 고개를 퇴미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지명이 붙어있는 곳을 답사하다 보면 대부분 토성의 유지가 찾아진다. 경기도를 위시해 충남·충북, 호남 지역에서 많이 조사되고 있다.

퇴미 유적은 석성보다는 흙만을 다져 쌓은 초기 토성의 유구들이 많다. 경기도나 충청도 지역의 퇴미들은 마한 시기나 백제 초기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낮은 곳은 70~80여m 높은 곳은 200~300m 정도의 산에 인위적으로 구축한 퇴미 즉 토성의 유구가 존재한다. 성안에서는 다수의 원삼국시대 적색토기나 연질의 백제토기들이 수습된다. 이 유물들을 보면 퇴미의 주인공들은 마한 혹은 초기 백제인들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안성 도기동 유적, 춘천 우두산 유적, 포천 반월성, 단양 온달성, 평창 노산성, 지난 <글마루> 2022년 5월호에 게재된 경기도 가평 조종면 소재 현리산성 등이다. 마한, 백제 초기 판축성의 유구가 완연하게 찾아진 곳들이다. 그런데 이들 산성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정연한 석축산성이 발견되었다.

백제식 토석축 판축성에 고구려가 정복하여 석축으로 보축한 것이다. 포천 반월성 유구는 고구려식 축성 구조가 가장 잘 남은 산성이다. 성의 남면은 토성의 판축 구조가 살아있고 북편에는 고구려식 석축성의 유구가 장엄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진접읍 퇴미산성은 속칭 고성산과 퇴미산이 합쳐진 유적이다. 남양주시 에코랜드에 있는 광릉숲 안내판에는 고성산으로만 표기돼 있다. 고성산으로 불리는 유적은 상한을 마한시대로 거슬러 올려 볼 수 있는 토성의 유구다.

퇴미산 석성으로 올라가는 긴 능선을 깨진 돌을 이용하여 판축했다. 이 토성은 퇴미산과 연결되어 있다. 능선으로 맞닿은 퇴미산 정상 부위를 석축으로 삼아 거대한 성을 만들었다. 마한 백제식 토성에 고구려식 석성의 구조를 가미한 복합성인 것이다.

진접 퇴미산에서 찾은 고구려 석축<여지승람>과 <대동지지(大東地志)> 양주조에는 ‘풍양고성(豊壤古城)’이 양주의 옛 현 서쪽 1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풍양고성. 고현이 서쪽으로 1리이다.’

전설에는 재미있게도 을지문덕 장군이 쌓았다고 한다. 경기도 일원에서 을지문덕 장군과 연계된 축성 설화가 채집되는 곳은 이 성이 유일하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진접읍 퇴미산 지배와는 시대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 시기쯤이면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군에 쫓기어 한강을 버리고 철수한 뒤다. 이 시기 온달의 실지회복 전쟁 등 고구려의 숙원이 이런 설화를 만든 것은 아닌지.

퇴미산의 높이는 371.8m. 별내면 광전리·청학리와 진접읍 내각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마을 주민들은 옛 성터 혹은 옛 봉화성터가 있어서 ‘옛 성산’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또 ‘고성산’이라고도 한다. 남양주시 자료에는 전장 500m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연결한 포곡성의 유구까지 더 하면 더 큰 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글마루 취재반과 한국역사유적연구원 조사단은 신록이 아름다운 5월 13일 남양주시 진접읍 에코랜드에서 올라가는 등산로를 택했다. 그러나 고성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해 수목을 헤치며 능선으로 올라가야 했다. 여름이 되지도 않았는데 땀이 목에까지 찬다. 1시간쯤 지났을까. 조사단은 결국 능선을 찾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뜻밖에 판축으로 된 토성의 유구에 올라선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바로 고성산 판축성을 밟은 것이다. 토성이 끝나는 지점에 높은 석축 장대가 눈에 들어온다. 아! 바로 퇴미산 석축성을 찾은 것이다.

곡성의 기초 유구
곡성의 기초 유구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밑에까지 석재가 산란하고 있다. 조사단은 장대 기초부위에서 곡성(曲城)의 기초 유구를 찾았다. 정연한 돌을 다듬어 둥글게 들여쌓기로 축조한 것이었다. 혹 옹성의 유구가 아닐까. 드러난 정연한 석재들은 장방형의 벽돌처럼 다듬었으며 금방 연마하여 쌓은 석재처럼 보인다.

고구려의 성의 특징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옹성과 치(雉)인데 진접 퇴미산성에서 이 같은 유구를 발견한 것이다. 고구려 성을 연구해 온 서길수 교수는 논문을 통해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기초 작업이라고 했다. 특히 고로봉식 산성은 성벽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등 지반이 나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의 안전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고구려 성벽 축조는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이나 약간 경사지게 하였고 성벽 하단 부는 굽도리 벽을 조성하여 경사지게 쌓았다. 이러한 굽도리를 조성한 계단식 기단부의 축성은 협곡이나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적용됐으며 백암성의 경우 높이가 4~6m나 된다. 남한 지역 고구려성 가운데 백암성을 닮은 유적이 강원도 영월 조양산성(속칭 왕검성)이다. 높고 장대한 석축이 아직도 1500년 세월을 지탱해 내고 있다.

진접 퇴미산성의 석축 기단부에서도 굽다리 벽을 경사지게 쌓은 유구가 찾아진다. 발굴 등 확대 조사가 필요하다. 성벽 구간이 많이 붕괴돼 날카로운 면이 드러난 일부 성체 밑은 벽돌처럼 다듬은 석재들이 무너져 뒹굴고 있다. 이 같은 형태는 환도산성 등 많은 고구려 성체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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