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image

세종대왕은 세자시절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운동 부족에다 평소 육식을 좋아한 탓에 살이 쪄 태종이 걱정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만년에 당뇨로 고생했는데 시력저하로 신하들의 얼굴마저 잘 알아보지 못했다.

세종 비 소헌왕후는 2살 연상이었다. 13세에 충녕대군(세종)과 혼인했으며 신랑은 11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세종은 누나 같은 소헌왕후에게 많이 의지했던 모양이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평생 금실이 좋았다고 하며 슬하에 82녀를 두었다.

세종은 소헌왕후를 공손하다하여 공비(恭妃)라고 불렀는데 시아버지 태종이 마음에 안 든다고 검비(儉妃)로 고쳐 부르게 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소헌왕후 친정은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한다. 부친 심온이 역적 혐의를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어머니는 관비로 전락했다.

외척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태종이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무참하게 제거한 것이었다. 졸지에 멸문지화를 맞은 소헌왕후는 이때 심정이 어땠을까. 어전에서 중신들은 세종에게 소헌왕후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세종은 중신들의 주장을 듣지 않았다. 세종 자신이 장인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린 대군들과 공주를 지성으로 키우는 중전을 내칠 수 없었다. 부친의 억울한 죽음과 관비로 비참하게 사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소헌왕후는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10명의 어린 자녀들은 어머니의 눈물을 기억했다. 그 가운데 제일 가슴 아프게 생각한 아들이 둘째 수양대군이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매도되는 수양대군은 불교를 신봉했으며 효자였다.

소헌왕후가 이질로 운명 직전 궁전을 빠져나가 머문 곳이 수양대군의 사저였다. 이곳에서 수양대군의 손을 잡고 운명한다.

이보다 앞서 세종은 소헌왕후를 데리고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청주초장약수를 찾는다. 서울에서 청주까지의 여정은 약 7일 걸렸다. 한강을 넘어 광주, 수원, 진천을 거쳐 세종은 초정 행궁에서 왕비와 단란한 시간을 가졌다.

세종의 청주 나들이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음성학에 밝은 성삼문이었다. 세종은 진행했던 한글창제를 조용한 청주에서 마무리를 짓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상정된다. 소헌왕후는 청주 나들이를 하고 온 후 중병에 걸렸으며 한글창제를 선포한 해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소헌왕후를 살리려고 백방으로 천신에게 기도하고 살인죄를 범한 죄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왕비는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조선왕조 세종실록을 보면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하들이 반대하는 금자경(金字經) 제작을 허락하고 세조에게 왕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경을 만들라고 엄명한다. 그것이 바로 석보상절이었다. 세종은 여기에 월인천강지곡을 붙여 이를 책으로 간행토록 했다.

소헌왕후의 위패가 모셔졌던 개성 불일사에서 간행된 옥책 월인석보 공양경은 이런 사연을 담고 있다.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 유물은 한글창제 이후 제일 먼저 우리글로 제작한 옥경(玉經)이자 세종의 아내사랑과 아들 세조의 효심이 어린 유물이다.

지난 16일 프레스 센터에서 공개된 옥제 월인석보는 8권의 내용을 각자한 것으로 글씨를 금니로 칠한 금자경(金字經)임이 다시 확인됐다. 옥경의 각자(刻字)와 문양은 모두 고대에서 내려온 전통방식(漢八刀法)을 따라 했다. 우리글로 만든 효와 예양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빛을 찾는 날이 왔으면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