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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거슬러 올라가서 1392(태조 1)년 7월 17일 태조(太祖)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업(創業)한 이후 58년이 지난 1450(세종 32)년, 세종(世宗)이 재위(在位) 32년 만에 승하(昇遐)했다. 세종의 생애를 세종실록(實錄)은 세종 32(1450)년 2월 17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며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經書)와 역사(歷史)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 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 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 나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人倫)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 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한편 세종이 승하한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어버이를 잃은 듯이 슬퍼하였으며 세종의 장의(葬儀)는 불교의식(佛敎儀式)에 따라 거행하여 빈전(殯殿)에 법석(法席)을 설치하기를 3일, 7일에는 수륙재(水陸齋)를 행하고, 소상(小喪), 대상(大喪) 모두 불교의식으로 하였다. 

그 이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청(請)으로 부왕(父王)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대자암(大慈庵)을 중창하고, 사경 사업(寫經事業)도 추진하였다. 세종이 안장(安葬)된 영릉(英陵)은 처음에 경기 광주 대부산에 안장하였다가, 예종(睿宗) 대에 여주로 천장(遷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끝으로 조선(朝鮮)의 성군(聖君)이었던 세종이 승하한 지 어느 덧 57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본 칼럼을 통하여 우리사회에 세종의 생애가 널리 알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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