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암사 괘불(오른쪽)과 초본(왼쪽).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법회나 야외 의식에 사용
‘걸개를 마련해 매단 부처’란 뜻

문무왕 법민조에 ‘채백’ 기록
당나라 군대 물리치는 데 이용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초대형 괘불을 공개했다. 공개된 ‘개암사 괘불’은 펼쳤을 때 높이가 1317㎝인 괘불 중에서도 매우 큰 크기를 자랑한다. 괘불은 불교에서 특별한 법회나 의식을 할 때 괘도처럼 만들어 걸어두는 대형 불화다. 그 말 속에는 ‘걸개를 마련해 매단 부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자수를 놓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천에 불상을 그리고 이것을 베에 배접한다. 아래에는 원형 축을 달고, 위에는 삼각형이나 반원형 축을 달아 두루마리로 감을 때 부피를 줄여 사용하기 편하게 제작됐다.

한국에서 괘불 제작을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 ‘기이’의 문무왕 법민조에 “명랑(明郞) 법사가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사용해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채백이 괘불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7∼18세기에 들어서 괘불의 제작이 활발해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괘불은 밝고 화사한 홍색과 녹색을 기본 바탕으로 사용했다. 전형적인 불화다. 하지만 호화스러운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무늬는 보상당초문을 비롯해 연화문·국화문·모란문·봉황문·귀갑문 등 대형 화면에 걸맞게 장중한 무늬를 주로 썼다.

개암사 괘불은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석가삼존(釋迦三尊)’을 중심으로, 상단에 다보여래와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그려 칠존상(七尊像)을 표현했다.

이 불화는 당시 최고의 화사였던 의겸을 수화승으로 영안, 민희, 호밀 등 화승 12인이 함께 참여해 모두 13인이 그렸다. 화면 하단에는 화기가 있어 제작연대와 괘불의 명칭, 시주자 등 불화 조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준다. 화기에는 개암사 괘불이 1749년에 영산회(靈山會) 의식에서 사용되는 ‘영산괘불’이라고 조성됐다.

개암사 괘불의 바탕은 너비 30㎝의 삼베 28폭을 이어서 마련했다. 화려한 채색을 위한 안료를 비롯해 많은 물품이 사용됐는데, 화기에는 괘불의 제작에 필요한 물품을 공양한 이들(일반신도 191명, 승려 59명, 총 250명)도 기록됐다.

▲ 개암사 괘불 지주 (사진제공: 국립중앙박물관)

개암사에는 이 괘불과 같은 크기의 초본이 전해진다. 초본은 불화 제작에 꼭 필요한 밑그림으로, 괘불의 초본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또 개암사 괘불처럼 큰 크기의 초본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개암사에 전해지는 기록을 보면 이 괘불은 영산재(靈山齋) 등의 의식 이외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도 사용됐다고 한다. 19세기 부안 지역에 가뭄이 계속돼, 괘불을 걸고 부처에게 비를 내리게 해달라는 제(祭)를 청하자 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 있다.

한편 한국의 괘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가장 오래된 나주의 ‘죽림사세존괘불탱(보물 제1297호)’은 1623년에 제작됐다. 구례의 ‘화엄사영산회괘불탱(국보 제301호)’, 안성의 ‘칠장사오불회괘불탱(국보 제296호)’, 무주의 ‘안국사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7호)’ 등이 유명하다.

한국 외에 괘불을 사용하는 나라로는 티베트와 몽골이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수를 놓은 괘불을 사용한다. 티베트에서는 괘불을 탕카(Thangkas)라고 부르는데, 주존은 석가모니지만 때로는 성인이나 각 종파의 교주 등을 그리기도 한다.

개암사 괘불 전시는 2015년 4월 2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불교회화실(상설전시관 2층)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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