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덕수궁 중화전 가을 전경과 석조전 등 서양식 건축물 외관, 준명전 전경. (사진제공: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사저 확장하고 임시로 조성해
궁궐 건물 배치 고르지 않아

고종 황제 마지막 거처였으나
日 강압에 퇴위 후 명칭 변경

인왕산 자락부터 이르던 규모
큰 화재로 불타고 일부만 중건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서울의 중심 정동에는 서양식 건물이 함 께하는 조선의 궁궐 ‘덕수궁’이 있다. 근현대를 상징하는 덕수궁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이었다. 덕수궁(德壽宮)이란 명칭의 ‘덕수’는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뜻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의미에서 ‘왕위에서 물러난 임금’ ‘덕으로 원수를 갚으라’ ‘왕위에서 물러났음을 서운해 하지 말라’는 뜻이 기도 하다.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명칭이 바뀐 사연은 무엇일까.

개인 사저에서 궁궐로 자리 잡다
덕수궁 자리는 원래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1593년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피신했던 선조가 한 성으로 돌아온 뒤에 이곳을 임시거처로 삼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불렀다. 선조는 협소한 경내 면적을 점차 넓혔다. 1597년에는 담을 둘러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608년 2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으며, 광해군도 이곳 서청(西廳)에서 즉위했다. 광해군 때부터 ‘경운궁’으로 불렸으나, 1620년에 궁궐의 아문(衙門) 등이 허물어지면서 궁의 모습을 잃어갔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태후와 태자비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했다. 그리고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전각 등의 건립이 이뤄지고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건물의 배치도 이때 자리를 잡게 됐다. 그해 9월에 ‘대한제국’이 세워지고,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한 뒤에는 정궁(正宮)이 됐다.

이때를 전후해 궁내에는 많은 건물이 지어졌고, 일부는 서양식을 따르기도 했다. 고종은 선원전·함녕전·보문각·사성당 등을 조영해 왕궁의 면모를 갖추고 궁궐의 영역도 더욱 넓히고, 1900년인 광무 4년 1월에는 궁담을 쌓았다.

대한제국 공표… 서양식 건물 들어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경운궁 즉조당에서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공표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군사 강국의 침탈에 대응하고자 경운궁에 신식 군대가 머물 수 있는 병영을 설치하고 여러 건물을 증축하면서 황제국가로서의 격을 갖추려 했다. 이로써 경운궁은 인왕산 자락인 사직동에서부터 현재의 서울시청 가까이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하지만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됐다. 이듬해인 1905년에 급한 대로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함녕전 등이 중건됐으며, 1906년에는 대안문을 수리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에는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고종이 이곳에 거주했다. 하지만 이때 고종은 강제로 퇴위를 당하고, 일제에 의해 경운궁에서 지금의 덕수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 1910년에 영국인 하딩의 설계에 따라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石造殿)’이 건립됐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규모가 가장 작다.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했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않다. 그리고 석조전과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이 있어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덕수궁은 국내·외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명소다. 대한문 앞에서는 수문장 교대식도 재현되며 시민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지난달 13일,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5년간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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