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오랜 동안 고단한 삶을 살았다. 왕족이었으나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글을 많이 읽어 학식이 깊고 그림도 잘 그렸다. 노래도 잘 불렀다. 하지만 늘 가난했다. 굶지 않으려고 궁궐의 물품을 관리하거나 능을 관리하는 능지기도 하였다. 능지기는 그야말로 말직 중의 말직이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1737~1805)도 가난을 면치 못해 능지기를 했다. 후세에까지 문명을 날릴 만큼 대단한 작가이자 선비였기 때문에 그가 궁핍한 삶을 살았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는 출세의 길을 버리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문학에 정진하며 살았다. 아내와 자식들은 처가로 보내고 홀로 글을 읽고 쓰며 살았다. 요즘으로 치면 ‘기러기 아빠’를 자처한 것이다.

연암은 50세가 되어서야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길에 나섰다. 미관말직이었지만 당장 굶어 죽을 판이었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보잘 것 없는 관직이라 부끄럽기도 했지만 인사 청탁 한 번 하지 않았다. 55세 때에는 능관, 즉 능지기로 재직했는데 이 때 이런 시를 지었다.

‘한두 잔 막걸리로 혼자서 맘 달래노라/ 백발이 성글성글 탕건 하나 못 이기네 /천 년 묵은 나무 아래 황량한 집/ 한 글자 직함 중에도 쓸데없이 많은 능관일레 /그래도 계륵처럼 버리기 아깝구려.’

천재 소리를 듣던 천하의 연암도 가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별 볼 일 없는 능지기 직일망정, 먹을 것은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계륵 같다고 한 심사가 알 만하다. 다 빠지고 몇 올 남지 않은 백발은 탕건 하나 이기지 못하니, 늙고 가난한 선비의 처지가 눈에 선하다.

연암의 아내는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남편이 아내 보기 민망하다며 오십 줄에 미관말직으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 왔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연암도 고생만 하다 죽은 아내가 불쌍하고 미안했던지 아내를 기리는 시를 많이 지었다. 하지만 죽고 없는 마당에 시가 다 무슨 소용이랴.

연암이 명작을 남기고 실학파의 선구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가난을 함께 견뎌 준 아내 덕분이었다. 그야말로 ‘조선시대’ 이야기다. 요즘 세상에선 턱도 없는 소리다. 요즘 세상에 연암처럼 했다가는 당장 이혼감이다. 가난한 시간을 견뎌준 아내 덕분에 성공했다며 TV에 나와 자랑하는 배우가 있긴 하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다.

가난해야 창작열이 불타오른다는 말이 있다. 이 말도 따지고 보면 굶어 죽지 않으려면 죽어라 작업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먹고 사는 걱정이 없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오는 법이다. 세계적인 명작들 상당수는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를 만났을 때 탄생한 것들이다.

예술가가 아니어도 정직하게 살기가 어렵다. 자식들 교육비다 뭐다 해서 아내가 쪼아대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감옥에 가기도 하고 꿈이 깨어지고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명예롭기 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도,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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