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인(仁)을 체득한 군자라야 ‘장인(長人)’, 즉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천하에 두루 인을 베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표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천하의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다. 예(禮)와 의(義)를 수단으로 삼아 화합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묵자는 유가의 인을 겸애(兼愛)에 이르지 못하는 체애(體愛)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왜 그런가? 유가는 인을 앞세우지만 구체적 실천수단으로 제시한 예는 결국 자기와 가까운 순서로 확대된다. 공자가 내세운 윤리적 황금률인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원칙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이 기준일 뿐이다. 묵자는 더 적극적으로 남이 하고 싶은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묵자의 주장은 보시를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와 같다. 6바라밀의 우선인 보시는 철저히 대상 우선의 사랑을 구현하는 것이다. 보살은 그것을 깨닫고 실행하는 주체이다.

플라톤은 사랑이 절대적 가치인 선(善)과 미(美)에 대한 갈망, 즉 지혜에 대한 갈망으로 철학의 원동력이라고 규정했다. 흔히 플라토닉 러브를 육체적 사랑과 상대적인 정신적 사랑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진정한 사랑은 이기심과 원초적 욕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소유욕이 배제된 관조로 달성된다. 칸트는 타자의 행복을 위한 순수한 염려인 진정한 사랑과 감각과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병리적 사랑으로 구분했다. 플라톤에서 칸트로 이어진 사랑의 개념은 소크라테스의 개념보다 편협하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새로운 가능성을 구체화했다. 그에게 에로스는 상대의 사지에서 모든 힘을 빼고 올바른 정신과 현명한 충고를 무력화시키는 무절제한 관능적 욕정의 신이 아니다. 이전의 에로스는 그저 재미로 남의 사랑에 개입하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절제력을 상실한 신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새로 규정한 에로스는 상대적 존재의 결합으로 탄생하는 만물의 아버지였다. 에로스는 적극적 개입이 아니라 중재자일 뿐이다. 에로스가 틔운 사랑의 싹을 키우는 것은 인간의 소관이다. 이제 인간은 욕망을 개인적 만족으로 끝낼 수도 있고, 자신과 사회의 선이라는 고차원적 경지로 승화할 수도 있다.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인간에게 사랑의 선택권을 넘긴 점이 소크라테스의 매력이다. 선택은 개인의 지혜에 따라 달라진다. 지혜는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지혜는 신성함과 대비적인 인간의 가장 큰 매력이다. 지혜와 욕망의 조화로 인간의 사랑은 이데아를 향한 열망과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으로 승화된다. 연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개별적 관계와 욕정을 넘어서면 자아와 사회 사이에서 질서와 조화가 이룩된 온전성을 깨닫는다.

소크라테스의 설정은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의 정신적 공황상태를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아테네 몰락의 원인은 외부에 있지 않았다. 시민 사이의 소통문화가 붕궤되자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도 몰락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시민의 힘을 결집시키는 민주주의의 핵심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신 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감정이야말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저력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회복을 요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고정관념의 틀을 허물려고 했다. 아테네는 시민끼리의 사랑이 힘이라는 경험을 망각했다. 사람들은 신에게 기대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에로스처럼 신은 고유의 권능으로 세상에 작용할 뿐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요구는 신으로부터 독립된 인간의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그를 죽인 것은 화가 난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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