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가올 시대는 한민족이 세계를 리드하고 통치해 나갈 것을 많은 예언가들이 한결같이 증언해 왔다. 어쩌면 우리만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가운데 집안싸움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우리의 존재성과 가치성을 깨달아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온 세계는 지금 우리를 향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조선인보다 더 조선과 조선인의 정신과 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한 푸른 눈을 가진 선각자(先覺者)의 생각과 행적을 더듬어 우리의 잃었던 자아를 되찾아 보고자 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내재된 정신과 문화는 어떠한 것이기에 세계는 우리를 주목한다는 것인가.

독일의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일원으로 1911년 우리나라에 수도와 선교를 목적으로 진출한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이야기다.

그는 알려진 바대로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었고, 영원히 묻혀버릴 수밖에 없었던 조선 제1의 화가 정선의 화첩(금강산 진경산수화 21점)을 오늘날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에 의해 병합(1910년, 한일합방)되어 피폐한 상태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던 시대다.

그러나 그 때 선교를 목적으로 들어온 베버 신부의 눈에는 조선인들에게 내재된 놀라운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가치를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정신과 문화를 우리가 소유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외국인의 눈으로 그 가치를 알아 볼 수 있었다는 베버 신부의 놀랍고 예리한 감각 또한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는 조선을 두루 돌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며 더욱더 조선인의 정신과 문화에 깊이 매료된다. 결국 1925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발간하게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한일병합 이후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민속의 많은 것들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도 곧 같은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내용들 중에서 일부분은 내 지칠 줄 모르는 펜이, 또 다른 많은 모습들은 내가 찍은 사진들이 붙잡아 둘 수 있었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칠 줄 모르는 조선 문화에 대한 애착은 수도원 내에 ‘한국관’이라는 박물관을 따로 두어 조선인의 의식생활도구며 종교 용품에 이르기까지 400여점이나 남겼다. 특히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진 것은 서민들의 문화였다.

19세기 당시 유럽인들은 유럽의 문화가 최고라고 자부하던 시대다. 그러나 낙후된 조선에서 베버는 유럽 문화와 동등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베버 신부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한국의 농사 문화를 통해 한민족의 숭고한 정신을 읽게 된다.

즉, 농사에 대해 기록으로 남긴 메모장에는 ‘품앗이’를 언급하는데 ‘이들의 민족성은 거대한 농사를 함에 있어서 품앗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창안해 냈다. 품앗이는 함께 단합하고 서로 돕고 다른 사람을 믿으며 가난 속에서도 저마다 개인적인 욕망을 이룬다는 민족정신의 한 부분이 내포돼 있다. 한국에서의 불행은 원수를 알지 못한다’라고 회상하며, 품앗이는 유럽에선 상상할 수 없는 공동체 문화임을 고백했으며, 한국의 위대한 민족정신을 극찬했다.

이어 그는 1925년 조선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카메라와 기사를 대동했다. 그리고 조선의 모든 풍경과 풍습을 담아 116분짜리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식민 지배하에 있는 친구의 나라에 보내는 우정의 선물이었다.

마틴 신부는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어요. 일본은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배울 것을 강요하고 한국의 문화가 사라지고 모든 게 일본화 되길 바랬죠. 베버 원장은 그 최후의 순간에 한국 문화를 구출하고 이후의 세대들을 위해 그것을 보존하고자 했어요. 한국인들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행위였지요’라고 회고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그는 특히 조선의 무속과 관혼상제 등 삶과 죽음에 관한 조선의 종교의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종교성이 많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말을 계속 들어보자. ‘문화사적으로 가치 있는 많은 것들을 사라지려는 마지막 순간에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닐지는 가까운 미래에 친애하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수집된 자료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자료들은 영원히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중략). 여기서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습득하기 위하여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정진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는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이와 같은 길로 계속 정진한다면 조선은 차츰 그 옛날 누렸던 문화 수준으로 다시 올라서게 될 것이다. 동방의 민족들 사이에서 단순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의미 있는 위상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또 그는 필름이 15km에 이르는 조선을 담은 기록영화(‘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독일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하게 했을 정도로 조선을 사랑했다. 식민지배로 인한 사라지는 조선의 문화를 염려했다.

그리고 그는 왜 수많은 조선의 화가들 중에서 겸재 정선의 그림을 수집했을까.

겸재의 붓 끝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 즉, 조선인의 정신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했으며 지키려 했던 베버, 그것은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 세계 만민의 것이었음을 미리 알아 본 베버, 그 분의 말대로 이제 우리의 위상을 높이 나타낼 때가 왔음을 깨닫고, 소인의 마음보다 대인의 심장인 품앗이 정신으로 거듭나는 민족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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