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서민들의 술 소주가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것은 고려 때다. 몽골 민족이 세운 원나라의 의복과 음식 풍속 등이 많이 들어와 크게 번졌는데, 소주도 그중 하나다.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술 제조법이 몽골을 거쳐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인데, 서양의 위스키, 중국의 베갈, 러시아의 보드카가 모두 이 소주와 같은 계열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북쪽 지방에서 주로 마셨지만 나중에 몽골군이 주둔했던 경상도 안동 지방에서 유행하여 지금의 안동소주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소주는 예로부터 있어온 것이 아니라 원나라 때 비로소 그 (제조)법이 만들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이수광도 ‘지붕유설’에서 “소주는 몽골에서 나왔는데 약으로나 쓸 뿐이지 함부로 마셔서는 감당하지 못 한다”고 하였다. 소주는 화주(火酒)로 불릴 만큼 독한 술이었지만 막걸리와 함께 가장 대중적인 술이 되었다.

소주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그 느낌 역시 쓰고 독하다. 고려 원종은 삼별초로 원나라에 맞서 항쟁하던 무신들로부터 왕권에 위협을 느끼자 원을 등에 업고 왕위를 이어가려 했다. 원 임금에게 세자를 원의 공주와 혼인케 하면 그로부터 태어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으니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사정했다. 원 임금은 처음에는 시큰둥했으나 원종이 질기게 매달리자 마침내 허락하였다. 그래서 원의 공주와 혼인하여 원의 사위가 된 게 충렬왕이다.

충렬왕에게는 이미 왕비와 둘 사이에 난 아들도 있었지만, 원의 공주를 본처로 앉히고 그 둘 사이에서 난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적실 왕비는 몽골의 공주에게 왕비 자리를 내준 것은 물론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임금 자리를 빼앗기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보아야 했다. 원에서 시집 온 새 왕비는 교양도 없고 거칠기가 말 할 수 없었고 질투심도 대단했다.

충렬왕도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 앞에서 벌벌 기었다. 새 왕비는 별일 아닌 걸로 강짜를 부리기 일쑤였고 왕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 공식석상에서도 왕보다 왕비의 자리가 더 높았다. 왕비가 중앙에, 그 좌우로 왕과 몽골인 대신이 앉아야 했다. 신하들이 보기에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만, 몽골 처가의 힘을 빌려 권력을 이어가려던 고려의 왕이 자초한 서글픈 모습이었다.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기 전 세자 시절에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면서 이미 망신살이 뻗쳤다. 몽골인들처럼 변발을 하고 몽골식 의복을 입고 나타나 사람들을 경악케 한 것이다. 그 꼴을 본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원나라 사위가 되어 권력을 누리겠다는 열망만이 가득했다.

충렬왕 이후에도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임금 호칭에 ‘충’자를 넣었고 원나라 왕비의 피를 갖고 태어난 왕들이 왕위를 이어갔다. 원나라에 조공과 공녀를 갖다 바치면서 권력에 집착한 고려의 바보 왕들이 줄줄이 등장했던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처신을 잘못 하면 애꿎은 백성들만 죽어난다. 소주가 쓴 것은, 그걸 잊지 말라는 뜻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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