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숙손통은 설나라 사람으로 진(秦)나라 2세 호해 황제 때 학문을 인정받아 박사(진나라 관직) 후보로 조정에 불려가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수 년 뒤에 진승이 기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진나라 도읍에 전해졌다. 2세 황제 호해는 그 보고를 받자 박사들과 학자들을 모아 자문을 구했다.

“초나라 변경 수비병들이 기현을 함락시켰고 이어서 진나라까지 쳐들어 왔다하오. 앞으로 어떡하면 좋겠소?”

박사와 학자들 30여 명이 각기 나아가 대답했다.

“천자께 활을 겨누다니 백성이나 신하된 도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품었더라도 반역죄가 됩니다.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당장 군사를 보내서 진압시켜야 합니다.”

반역이라는 말을 듣자 호해 황제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숙손통이 나아갔다.

“여러분이 하신 말씀은 잘못된 의견입니다. 지금은 천하가 한 집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군과 현의 성벽은 헐어버렸고 무기는 녹여 버렸으며 이제는 전쟁이 없다는 것을 천하에 밝힌 바 있습니다. 더구나 총명하신 황제 앞에서 모든 법령은 저 밑바닥까지 잘 지키고 있으며 백성들은 각기 자기 일에 충실하여 변경으로 나갔던 병사들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와 같은 때에 어찌 반역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진승은 단순한 도적떼에 불과하니 황제께서 손수 진압에 나설 일이 못되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관리들이 잡아서 모두 처벌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진나라 황제는 그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학자들에게 일일이 의견을 물었다. 그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즉, 반역설과 도적설로 갈렸다. 황제는 반역설을 내세운 학자들이 불온한 말을 퍼뜨렸다 하여 감찰관에게 심문한 다음 옥리에게 넘기게 했다.

일방 도적설을 주장한 학자들은 누구 하나 책임을 묻지 않았고 숙손통에게 비단 20필, 의복 1습을 내리고 박사로 승진시켰다.

숙손통이 궁전에서 물러나오자 동료 학자들이 비꼬았다.

“그렇게 아부를 하다니 학자로서 지나친 행동이오.” 숙손통이 대답했다.

“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내 몸이 위험했기 때문일세.”

숙손통은 그렇게 변명하고 나서 서둘러 고향인 설 땅으로 도망쳐 버렸다.

설나라는 이미 초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항량이 성으로 들어오자 숙손통은 그를 받들었다. 머지않아 항량이 정도에서 싸우다가 죽자 이번에는 희왕을 받들었다. 결국 진(秦)나라가 망하고 희왕이 의제가 되어 장사로 옮겼으나 숙손통은 그대로 설나라에 머물며 항왕을 받들었다.

한(漢)나라 2년(기원전 205년) 고조가 5명의 제후들을 이끌고 항왕이 있는 팽성으로 쳐들어 가자 숙손통은 고조에게 달라붙었다. 고조가 패해서 서쪽으로 물러가자 숙손통은 이번에는 고조 유방과 행동을 같이했다. 숙손통은 늘 학자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고조가 그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자 곧 벗어 버리고 강소성 사람들이 즐겨 입는 단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곳 출신인 고조에게서 큰 환심을 샀다.

숙손통이 고조를 따랐을 때는 제자 백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 중에서 누구 하나 고조에게 추천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적이었거나 무뢰한이었던 자들을 계속 추천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선생께 배운 지 여러 해가 됩니다. 다행히 고조께서 기용할 때가 되었는데도 선생님은 어째서 우리를 무시하고 무뢰한들만 추천을 하십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을 듣게 된 숙손통이 변명을 했다.

“왕께서는 천하를 손에 넣으려고 싸우고 계신다. 학자들이란 전투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 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을 추천한 거야. 부디 모두들 때를 기다려라.”

숙손통은 용감한 자들을 추천한 공로로 고조로부터 박사에 임명되었고 직사군의 칭호를 받았다. 드디어 한나라 5년(기원전 202년) 고조가 천하를 통일하자 제후들은 정도에서 고조를 황제로 추대했다. 숙손통은 즉위의 의식 절차와 칭호를 정하는 일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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