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협의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떤 학파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장태염, 양계초 등은 유가를, 후외려, 문일다, 노신 등은 묵가를 기원으로 본다. 둘째는 어떤 계급을 협의 기원으로 보는 견해이다. 풍우란은 사(士)에서, 도희성은 유민(流民)에서 협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사람의 기질과 정신을 기원으로 본다. 유약우와 최봉원이 대표적이다. 첫째와 둘째는 근거가 부족하다. 협은 한 학파나 계층에서만 나오지 않았으며, 유가나 묵가 출신만은 아니었다. 위로는 왕후장상에서 아래로는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협을 배출했다. 셋째가 합리적이지만, 이러한 기질과 정신의 근원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 일반적으로 협의 기원은 씨족사회의 유풍으로 알고 있다. 씨족의 구성원들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돕고 살았다.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모두 나서서 원수를 갚는 것이 사명이었다. 집단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목숨을 걸고 씨족의 이익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야 했다. 청대의 공자진은 하, 은, 주 시대에 책임감을 중시한 ‘임(任)’이라는 유형의 집단이 존재했고, ‘협’은 선진시대에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일리가 있다.

하(夏)는 원시씨족공동체였다. 구성원끼리 상부상조를 중시했으므로 ‘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봉건시대가 시작되자 통치계급은 노예제도를 저변에 둔 비교적 완전한 통치질서를 세웠다. 강대한 국가기구가 등장하자 강상(綱常)과 명교(名敎)로 행위를 제한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제로섬게임에 주력했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유풍을 고집하는 유형의 사람들도 남아있었다. 이들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도왔으며, 복수를 용감한 행위로 여겼다. 누구나 할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이들을 협이라고 불렀다. 춘추전국시대에서 진한시대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원시시대의 유풍을 지키는 지역이 많았다. 춘추시대 위(衛)의 남쪽에 원시시대 유풍이 강하게 남은 포(蒲)라는 지역이 있었다. 위령공이 포를 정벌하려고 하자 공자는 포의 남자들은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며, 여자들도 서하(西河)를 지키려 한다고 대답했다. 위령공은 계획을 포기했다. 이처럼 용감하고 거친 풍속은 씨족사회의 유풍이다. <사기 화식열전>에서는 종(種), 대(代), 석북(石北)은 호(胡)와 가까이 있어서 자주 침략을 당하다 보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강인해졌다고 했다. 이들은 농업이나 상업보다 강인하고 포악한 기질을 높이 평가하며 임협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유목민족과 싸우면서 일반화된 기질이기도 하지만 원시씨족사회의 유풍인 것은 확실하다.

소수민족인 여족(黎族)은 활을 잘 쏘고 호전적이며 원수는 대를 이어서라도 반드시 갚는다. 가까운 친구들과 모여 술통을 대들보에 걸어두고 활로 쏘아 맞히면서 복수를 서약한다. 활은 조상이 남긴 것을 사용하며 시합에서 지면 수치로 여긴다. 활을 쏜 기록은 대들보에 적어둔다. 술에 취하면 깰 때까지 소란을 피우다가 다시 술을 마신다. 복수할 날이 되면 상대의 집에 미리 알린다. 전사들이 모이면 적을 앞에 두고 진을 친다. 관리들을 만나면 즐겁게 구경하라고 요청한다. 여자들까지 진영에 모인다. 식사가 끝나면 여자들은 화살을 진영으로 나른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금기시한다. 남자끼리 원수인 경우는 정면대결로 끝장을 내지만, 여자가 개입되면 원한은 더 깊어진다. 승패가 나기 전에 도망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투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더라도 부모나 아내가 우는 것은 수치이다. 적에게 약하다는 것이 알려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唐代)까지 남아 있던 여족의 풍속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여러 지역에 이러한 씨족사회의 풍속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협객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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