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동래향교 정문인 '반화루'. ⓒ천지일보(뉴스천지)

동래는 옛 부산의 이름이며 오랫동안 부산의 행정·문화적 중심지로 양반들의 문화와 유교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 조선시대 유학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국립지방교육기관으로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동래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향교는 조선 시대의 학교를 이르는 말로 당시 전국 향교를 통해 지방 학동들이 교육을 받고, 뛰어난 인재들은 다시 한양에 있는 성균관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동래향교는 1392(태조 1)년에 국가의 교육진흥책에 따라 유현(儒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배향하며 지방민을 교육하려고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타 없어져 1605(선조 38)년에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다시 지었다.

동래향교는 크게 정문인 문루와 동·서재를 포함한 명륜당으로 이뤄진 강학공간과 대성전과 동·서무를 포함한 배향공간으로 나눠진다.

향교의 건물배치를 보면 대지가 평지인 경우 전면에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반면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곳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특히 동래향교는 전학후묘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강학공간에 비해 배향공간이 우측 고지에 위치해 일반 배치와 달리 2열로 배치되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동래향교는 이와 같은 배치형식에도 향교로서 갖춰야 할 건물들이 모두 갖춰져 있으며 모든 건물에 근대적인 변형이 적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돋보이는 문화재다.

강학공간의 정문인 반화루는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동래향교의 교품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명륜당은 학생의 수업을 위한 공간이며 때로는 유림의 회합장소로도 이용됐다. 명륜당과 반화루의 중심축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대칭으로 배치돼 있다.

유교에서는 동쪽이 서쪽보다 위계상 상위 개념이기 때문에 동재에는 양반유생들이 서재에는 서류(서얼 등)들이 사용했다.

배향공간은 외삼문, 내삼문, 대성전, 동·서무로 구성돼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 이하의 유학자가 모셔져 있으며 대성전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제자들과 우리나라 유학자 18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 봄·가을로 ‘석전대제(釋奠大祭)’라는 제사를 지내게 된다.

현재 향교에서는 사대주의 성향을 타파하기 위해 동·서무에 있는 현인들의 위패를 대성전에 모시게 됐다. 하지만 강릉향교는 다른 향교와 달리 조선시대 그대로 모시고 있으며, 한국전쟁 때에도 건물이 불타지 않아 옛 규모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향교에는 ‘전교’가 있어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고 향교를 지키고 이끌어 나간다. 전교는 2년 임기로 유교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다.

또 향교에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했다는 것에서 유래돼 큰 은행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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