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자생적 교회 ‘소래교회’ 이야기

기독교가 전래되던 당시 소래에는 약 70호가 살고 있었다. 소래교회는 서씨들이 모여 사는 아랫마을과 광산 김씨들이 모여 사는 구석마을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이 두 가문은 모두 10여 년 전에 이주해온 일종의 피난민이었다. 광산 김씨는 김마리아 가문으로 그의 고조부 때까지는 서울에서 판서 벼슬까지 한 명문이었으며 서씨는 평북 의주의 양반가문이었다.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래(松川理)에 세워진 초가집 예배당으로서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이다.

서상륜은 본래 신의주와 만주 땅을 연결하는 고려문을 드나들며 인삼장사를 하는 상인이었다. 그러던 중 그가 30세가 되던 1878년, 갑자기 만주에서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를 맞게 된다. 친구들이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게 되고 그곳에서 로스(John Ross)선교사를 만나 보살핌을 받고, 매킨 타이어(John melntyre)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그후 그는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번역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 조선 왕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1883년 그는 완성된 성경 100여 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 권만을 지닌 채 탈출해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배척의 가운데서 성장하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송천리의 명칭은 순 토박이말로 '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다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는데,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들어갔다.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1883년 5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이 땅에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가족과 함께 친척이 살던 장연으로 이주하여 1883년 개신교회를 그의 고향 황해도 장연군 솔내에 설립했다.

가족과 함께 친척이 살던 장연으로 이주하여 1883년 개신교회를 그의 고향 황해도 장연군 솔내에 설립한 서상륜, 한국에서 최초로 안수를 받은 장로교 7인 목사 중 한 사람인 서경조 형제. 그들의 믿음은 초가집으로 시작한 작은 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급성장하게 된다. 1888년 4월의 고종이 내린 금교령 이래 1896년 7월에 교회가 고종탄신 경축기념예배를 드리는 시점에서 소래교회의 교세는 80여 명으로 58세대가 사는 소래에서 50세대가 신자가 되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그 후 소래교회는 1896년 32평 기와집 예배당을 건립하게 된다.

“이때 교인 수는 2백여 명이라 칭찬 아니 할 수 없는 일은 밤새도록 금식기도 하는 일,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이 되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신 불신을 막론하고 구제해 주는 일, 근농으로 교회설립 3~4년 만에 박토가 옥토 된 일, 주색잡기 투전 미신 등이 없어진 일,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었다."

소래를 거점으로 7지역 교회 생겨나

소래가 거점이 되어 인근 장연읍을 비롯해 송화, 은율, 풍천, 문화, 해주, 옹진 등 일곱 지역에 수십 개의 교회가 서게 되었다.
소래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가 1887년 초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래교회 신자들이었다. 또 그해 9월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주축이 된 것은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출신들이었다. 언더우드 등 서양선교사들이 잇달아 이곳을 방문했고 한국에 새로 오는 선교사들은 으레 소래교회에서 한국의 전통과 선교 방법을 익혔다.

일제시대 소래교회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규모는 작지만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였다.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교회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은 것을 지난 1988년 총신대 구내에 복원했다.
북한 땅에 있던 약 3200개의 교회 중에서 유독 소래교회만 남한에 복원된 것은 이것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개신교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또 이와 함께 소래교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해서제일학교의 설립으로 교회 건축이 끝날 무렵 매켄지와 서경조는 교인자녀 7~8명을 모아 사랑방을 빌려 학교를 시작하게 된다. 지리와 한글공부를 위주로 성경도 가르쳤다. 매켄지 사후에는 그의 유산 3천 냥과 교인들의 기부금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4년제 보통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여기서 세브란스 첫 졸업생 김필순과 첫 졸업생 서병호, 세브란스 전 원장 김명선 등을 비롯해 김필례, 김마리아,김함라 등 여성지도자들 그리고 허성묵, 허응숙 등 민족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국 교회의 창설에 선두

흔히들 한국의 천주교회는 자생교회이며 개신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식되었 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래교회가 보여주듯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산포에 근거를 둔다.

'역간된 복음서들은 누구나 읽으면 곧 그 뜻을 알 게되기 때문에 개종자가 급증,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열심히 책을 얻어 읽고 있는 현상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언더우드도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백성들이 점점 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국인의 신앙열정을 대변한 바 있다.

지금의 총신대 양지캠퍼스의 소래교회는 1895년 처음 세워지고 이듬해 증축된 두 번째 예배당의 모습이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자주적 신앙 전통의 계승과 한국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의 산교육 현장이 되며, 북한 교회의 수복과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하여 1988년 9월 30일 다시 증축되어 보존하고 있다.

교회 마당에는 1910년대 평양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다 일제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유명한 최권능 목사의 기념비도 서 있다.

예수 천국을 외치다

최권능은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다.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던 그의 삶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기생집에도 들어가서 전도하고, 남의 부엌에서도 전도하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목사와 장로들에게도 전도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하면 그는 “당신이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무섭게 책망할 정도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원초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전도에 헌신했던 한국교회사 속의 위대한 ‘전도대장’이었고, 예수 복음의 맛을 깊이 알았던 진짜 예수꾼이었다. 일신(一身)의 안일과 명예보다 주님의 명예가 더욱 소중함을 깨달았던 예수의 충복(忠僕)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에게 꽤 유명한 일화가 몇 가지 있다.
그 중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한 번은 최권능이 평안도 구성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들어가 전도한 뒤 그 옆집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전도한 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곧 김씨의 아들이 찾아와 그를 향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욕하면서 잡아가 자기 집에 가두었다. 이때 그는 오히려 그 아들에게 “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가 기도해서 아버지를 살려 줄 터이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묻자, 그 아들은 “믿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최 목사는 곧 죽은 그 김씨를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그 가족과 이웃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권능 목사는 본래 이름이 최봉석(崔鳳奭, 1869-1944)으로 그기 최권능으로 불리게 된 것에는 그의 삶과 사역이 놀라운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교회 외침 전도의 대명사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불신자들은 물론 신자들로부터도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당하거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언행은 언제나 반듯했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참조: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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