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삶의 법칙은 적자(適者)생존과 화자(和者)생존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몰론 극소수는 고립(孤立)생존을 도모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생존형태는 아니다. 유능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투쟁에서 이겨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강자에게만 생존을 허락하지 않는다. 진정한 강자는 적을 공존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모두를 공존의 틀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적을 소수로 만드는 능력이 필요하다.

분찰 또는 변찰(辨察)은 수많은 적들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대상을 고르는 방법이다. 우선 중적들의 활동상황, 행동양식, 세력판도를 보고 주차(主次)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차를 분명히 구분하려면 그들의 실력과 모순관계를 잘 살펴야 한다.

송태종 지도(至道) 3년 3월 29일, 태종 조광의(趙匡義)가 만세전(萬歲殿)에서 붕어했다. 그 전후로 제위를 둘러싼 치열한 정치적 각축전이 펼쳐졌다. 황태자 조항(趙恒)의 영명함을 꺼리던 선정사(宣政使) 왕계은(王繼恩)은 태종의 붕어를 예상하고 심복들과 조왕 조원좌(趙元佐)에게 황위를 잇게 할 밀모를 꾸몄다. 그들은 평소에 부지런히 태종과 황태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담대하고 치밀한 재상 여단(呂端)은 권모에도 밝았다. 국사의 요체를 정확히 인식한 그는 지금이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생각했다. 태종을 병문안하러 간 그는 황태자가 곁에 없는 것을 보고 정치적 음모를 직감했다. 그는 심복을 시켜 자신의 홀에 ‘대점(大漸)’이라는 글자를 적어 황태자에게 전달했다. 황태자는 재빨리 입궁했다.

태종이 붕어하자 왕계은은 황후에게 여단을 불러 새로운 황제의 인선을 상의하라고 건의했다. 여단은 왕계은 일당이 황후의 면전에서 황태자를 비난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서둘지 않았다. 우선 왕계은에게 태종이 조서를 작성할 때 사용한 먹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안심한 왕계은이 서재로 들어가자 바깥에서 문을 채워버리고 혼자서 황후를 찾아갔다. 황후는 황상께서 붕어하시면 장자를 후계자로 삼는 것이 순리인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여단은 미리 황태자를 책립하셨으니 다른 의견이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황후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지정사 온중서(溫仲舒)가 곧바로 태종의 유조를 읽었다. 유조대로 황태자 조항이 태종의 영구 앞에서 제위에 올랐다. 그가 진종(眞宗)이다. 여단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태자가 즉위한 후에도 평소대로 대전의 계단 아래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황제에게 주렴을 걷어달라고 요청한 후 대전으로 올라가 분명히 조항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계단에서 내려왔다. 여단은 비로소 조정의 모든 신하들을 인솔하여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축하했다.

정상적인 법이나 제도로는 황제가 붕어한 후에 황태자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송태종 말년에는 기존의 황태자 대신에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는 선정사 왕계은 일당과 합법적으로 기존의 황태자를 옹립하려는 재상 여단이 숨가쁜 정치투쟁을 펼쳤다. 여단은 뛰어난 정치적 기량을 발휘하여 황태자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는 공을 세웠다. 그의 조치를 되짚어보자.

첫째, 정적의 동정을 관찰하여 황태자로 하여금 태종의 임종을 지키도록 촉구했다. 둘째, 사태의 변화를 분석하여 황후가 새로운 황제가 될 사람을 고르라고 했을 때 결정적인 대책을 건의했다. 셋째, 표적인 정적 왕계은을 방안에 가두어 음모와 위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넷째, 새로운 황제가 황태자인지를 확실히 판명하기 위해 황제가 등극하는 행사에서 주렴을 걷도록 요청하여 직접 황태자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신하들을 인솔하여 땅바닥에 엎드려 재배를 올렸다.

여단은 정치투쟁의 관건이 되는 시각에 정확히 사태를 분멸하고 적의 음모를 파악하여 대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을 막았다. 공연히 큰 풍파를 일으켜 정권교체기에 발생할 혼란을 막기 위해 주적인 왕계은 한 사람만 고립시켰다. 전체적인 상황을 홀로 제어하면서 이룬 고도의 정치적 수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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