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를 한국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1심 판단이 나왔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우리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향후 다른 피해자들의 소송 제기가 잇따를 가능성이 제기된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7일 베트남인 응우옌티탄(63)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청구액 3000만 100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소송을 제기한 응우옌은 1968년 2월 발생한 이른바 ‘퐁니·퐁넛 학살사건’의 생존자다. 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군인들이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에서 주민 74명을 사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으로, 당시 여덟 살이던 응우옌은 가족 3명을 잃고 본인도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정부는 그동안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군사실무 약정에 따라 베트남인이 전쟁과 관련해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며, 공소시효도 소멸됐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군으로 위장한 세력의 범행이라거나 게릴라전으로 전개된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숨지게 한 것은 정당행위라는 정부 주장도 기각됐다.

재판부는 참전 군인과 학살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군사 당국 및 기관 간의 약정서는 합의에 불과하다”며 “베트남 국민 개인인 원고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청구권을 막는 법적 효력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번 사건에선 소멸시효가 만료됐는지도 쟁점이 됐다. 정부는 불법행위 시점이 이미 수십년 지나 소멸시효가 만료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원고는 이 사건 소를 제기할 무렵까지도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민법에 따르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는 가해자가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와 가해자를 피해자가 안 날부터 3년이 지나면 소멸한다. 다만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거나 채권자를 보호할 필요성이 큰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해외 형사사건 등에서 개인 일탈행위에 따른 처벌만 인정됐다. 이번 판결은 군인들이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어서 기존 형사 판결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게 변호인단의 시각이다.

이번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1990년대에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한일협정에 따른 개인청구권 소멸을 이유로 전부 기각한 일본 법원의 행태와 비교된다. 앞으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와 유사한 소송이 잇따를 가능성이 높다. 전쟁에서 민간인 살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면책이 될 수 없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 대한민국 정부는 책임 있고 성의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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