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 답사기②
조선 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릉
부부가 의기투합하며 왕좌 올라
태종, 외척 경계에 후궁 늘리자
왕후, 마음의 병 얻고 고통 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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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준 SG전략연구원장, 왕릉답사가

대모산 기슭 헌릉(서초구 내곡동)은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다. 타고난 정치적 기질과 승부수로 ‘왕의 자리’를 차지한 태종과 그가 머뭇거리면 등 떠밀고 위험을 모면토록 ‘코칭’하던 원경왕후가 나란히 자리한 곳이다. 부부는 왕좌에 이르고자 의기투합했으나 많은 부부 갈등을 겪었다. 특히 왕후는 많은 후궁이 들며 심한 고통을 겪었다. 부부는 세상을 뜬 지 600년이 지난 지금 후궁 없는 이곳에서 오붓한 부부의 정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군주 태종의 위세와 달리 헌릉은 옛날의 흔적이 많이 사라져 주변의 능지는 잘려 나갔고 제실이나 수라간 등 기본 건축물조차 찾아볼 수 없다. 태종이 살아있다면 불호령을 내릴 일이다.

◆원경왕후, 한때 폐비 될 뻔  

원경왕후는 8명의 자녀를 낳아 왕실을 튼튼히 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의 생모이다. 1418(태종 18)년에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덕왕대비가 됐으며, 1420(세종 2)년에 수강궁 별전에서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후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1420(세종 2)년 8월 24일자 헌릉지문에는 ‘태후가 어려서부터 맑고 아름다우시며, 총명하시고 인자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며 ‘상왕이 경사(經史)에만 마음 쓰시고 집안은 돌보지 아니하셨으나, 태후께서 남편의 공을 이루도록 힘쓰셨고, 여러 아들을 가르쳐서 옳은 데로 따르게 하셨고, 시첩들을 예로 대하여 부인의 도리에 극진하셨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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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전경. 정자각과 그 우측에 신도비가 설치된 비각이 있다. 정자각 너머에 왼쪽은 태종, 오른쪽은 원경왕후의 봉분이다. 왕릉 형식은 ①봉분이 하나인 단릉(태조의 건원릉), ②하나의 봉분에 두 사람을 묻은 합장릉(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③두 개의 언덕에 각각의 봉분이 있는 동원이강릉(에종과 안순왕후의 창릉), ④한 언덕 위아래에 봉분이 있는 동원상하릉(경종와 선의왕후의 의릉), ⑤한 언덕에 세 개의 봉분이 나란한 삼연릉(헌종과 두 왕비의 경릉)이 있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29

원경왕후는 왕비가 된 이후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태종이 외척을 경계하고 후궁을 늘려갔기 때문이다. 이미 왕비가 8명의 자녀를 낳았음에도 19명의 후궁을 들였다. 후궁과 관련한 1402년 3월 7일 실록은 “중4품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였다. 왕비의 어머니 송씨가 궁빈이 너무 많아 두렵다고 했다. 왕비의 투기는 심해져 갔다. 임금이 권씨를 예를 갖추어 맞으려 했다. 왕비가 왕의 옷을 붙잡고 ‘온갖 어려움을 딛고 국가를 차지했거늘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라고 하였다. 음식을 들지 않고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왕비는 마음의 병을 얻었고 왕은 수일을 정사를 듣지 않았다”고 했다.

1411년 9월 4일 실록에서는 태종이 “지금 왕비가 민무구 등의 일로 불평을 품고 불손한 말을 하였다. 지난날 모반을 음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왕비가 사사로운 한을 품으니 내가 폐출하여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라 차마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에 김여지가 “정식부인이자 국모이며 자손이 많으니 깊이 생각하소서”라고 하니 태종은 “내사를 대신할 여자를 들이고자 한다”고 했다. 태종은 왕비를 폐하려고까지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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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정자각의 후면 좌측에 있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석물인 ‘소전대’이다. 소전대는 태조 건원릉, 신덕왕후 정릉, 태종 헌릉에만 있다. 이와 달리 축문을 태워 땅에 묻도록 한 석물을 예감이라 한다.
​​​​오른쪽 사진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돌길이다. 보통 왼쪽에 향과 축문을 들고 들어가는 ‘향로’, 오른쪽의 제향 드리는 왕이 가는 ‘어로’가 있지만, 헌릉에는 어로가 없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29

◆마지막 노후를 정종과 함께 

태종은 퇴위 후 정종의 삶을 부러워해 항상 따르고 어울렸다. 형 정종을 아버지의 예로써 극진히 공경했는데 열흘이 멀다 하고 어울려 식사와 술, 격구와 사냥을 즐겼고 매사냥을 구경하거나 과거시험도 참관했다. 두 형제의 우애는 1418년 10월 27일 실록에도 잘 기록됐다. 내용을 보면 ‘상왕(태종)이 첫눈을 봉하여 몸에 좋은 약이라고 장난삼아 내신 최유를 시켜 노상왕(정종)에 올리라 하였다’라고 했다. (고려 때에 첫눈을 봉하여 서로 보내는데 만약 받는 사람이 알아채고 심부름 온 사람을 잡으면, 보낸 사람이 한턱을 내게 되어 있었다). 최유가 이를 내밀기도 전에 노상왕은 이를 알아채고 사람을 시켜 최유를 쫓아가 잡으라고 하였으나, 미처 잡지 못했다. 두 사람의 형제애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측근은 죽고 세자는 폐하다

태종이 왕에서 물러나기 수년 전부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1414년 평생의 동지이자 수하였던 조영무가, 2년 후에는 태종의 1등 공신이자 책사 하륜이, 이내 가까운 측근 이래가 죽었다. 이듬해 1·2차 왕자의 난을 함께 한 사촌형 이천우가 떠났다. 태종의 배향공신들이다. 설상가상으로 1418년 2월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죽었다. 즉위 후에 낳은 세종보다 8살 어린 막내였다. 실록은 “임금과 정비가 끔찍이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자식 잃은 슬픔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6개월 후 적장자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는 일이 벌어졌다. 양녕대군은 다음 국왕에 오를 왕세자였다. 그러나 주변의 기대에 못 미쳤고 의정부와 6조 등에서 목숨을 걸다시피 폐위를 주장했다. 곽선이라는 관료의 첩 어리를 임신시켰고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부왕에게 항명을 했다. 동생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 활쏘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태종은 1818년 6월 3일 폐하여 광주로 추방했다. 실록은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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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신도비각에는 좌측에 1422(세종 4)년에 세운 신도비(보물)와 우측에 1695(숙종 21)년에 임진왜란으로 손상된 신도비 옆에 증설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태조, 태조의 비 신의왕후, 태종, 세종의 4개 왕릉에만 세워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29

◆형제·부인 죽고 태종도 세상 떠 

태종은 큰 시름에 잠겼고 퇴위 후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내 다른 죽음들이 닥쳤다. 퇴위한 이듬해 9월 가장 의지하고 따르는 형이자 상왕 정종이 세상을 떴다. 9개월 후에는 부인 원경왕후가 떠났고 7개월 후에는 자신이 유배를 보낸 바로 위의 형 방간이 죽었다. 그리고 몇 달 후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연화방 신궁에서 훙(薨: 왕이 죽음) 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태종이 세상을 뜬 것이다. 실록은 “태상왕은 총명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많이 읽어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사물의 진위를 밝게 알며, 재주와 선행이 있는 자를 등용하며, 선대의 제사에 친히 참사하고, 중국과의 교제에는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벌을 정확히 하되 (중략)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차 있고, 해적들이 굴복하고, 예의가 바르고 음악이 고르며, 모든 법의 강령이 서고 조목이 제정되었다. 신선과 부처의 도를 좋아하지 않고, 사찰을 개혁하여 노비를 거두고 전답을 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마디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완벽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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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 봉분’. 헌릉은 같은 언덕에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다.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29

◆대모산 서쪽 능 자리에 얽힌 사연

1420년 원경왕후가 세상을 뜨자 헌릉이 조성됐고 1422(세종 4)년 태종이 승하하자 함께 묻혔다. 헌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은 각 2쌍씩, 석마, 석양, 석호는 각각 4쌍식 배치돼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계승했다. 1422(세종 4)년에 세운 신도비는 보물 제1804호다. 임진왜란 때 손상됐으나 1695(숙종 21)년에 신도비를 추가로 설치했다.

헌릉의 좌측 즉 대모산 서쪽은 태종 부부의 헌릉 이후 434년간 여러 왕과 왕비의 무덤이 들어섰다 나갔다 반복됐다. 1446(세종 28)년 세종의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영릉이 조성됐고 4년 후 세종과 합장했다. 그러나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1469(예종 1)년 여주로 옮겼다. 문종이 아버지 세종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자리가 좋지 않다하여 동구릉 현릉에 묻혔다. 중종의 장경왕후 역시 1515(중종 10)년 헌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다. 그러나 1537(중종 32)년에 문제가 있다 하여 희릉으로 천장했다. 결국 1856(철종 7)년 파주 교하에 있던 순조의 인릉이 현재의 자리로 천장했고 이듬해 순원왕후가 세상을 뜨자 합장했다. 수백년만에 태종과 원경왕후의 이웃에 후대의 왕릉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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