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하게 쌓은 석축… 후대에 많이 보축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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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보개산성 석축

경기도 포천과 인근의 강원도 철원은 고대 고구려 지명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포천은 ‘마홀(馬忽)’이고 철원은 ‘모을동비(毛乙冬非)’였다. 고구려가 대 백제, 신라 공격을 위해 내려온 교통로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포천시 문화원에 있는 유물전시관에는 반월성에서 출토된 ‘馬忽(마홀)’ 명문기와가 전시되어 있다. ‘마홀’은 무슨 뜻일까. 큰 성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고 고구려 세력의 지배를 받은 말갈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주 말갈(여진) 구토에 가면 ‘마홀’이란 지명이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모을동비’는 또 무슨 뜻을 지닌 것일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7 지리지에 “고구려(高句麗) 한산주 관내 철원군은 모을동비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도 “동주(東州)는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모을동비)이다. 신라의 경덕왕이 고쳐 철성군이라 하였고 뒤에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거의 차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강원도 철원(鐵原) 건치 연혁조에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으로 모을동비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철원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언어학자들은 ‘동비(冬非)’를 고구려 언어 ‘원(圓)’과 같은 뜻으로 본다. 그래서 나중에 ‘모을동비’가 ‘철원’으로 음운이화 했다고 보는 것이다. 개성의 옛 지명도 고구려 시기에는 동비홀(冬非忽)이었다. 모을(毛乙)을 신라 이두로 해석하면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지명에 ‘毛’자를 쓰는 특이한 사례가 탐라신화에 남아있다. “도성(都城) 남쪽 광양(廣壤) 들에 삼혈(三穴)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三乙那가 일어난 곳으로 三乙을 포개면 ‘毛’자가 되므로 毛興(모흥)이라 이른다고 한다.” 모을동비의 ‘毛乙’ 또한 삼신에 관련된 지명이며 삼한 본래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반월성에 대한 글은 지난 2020년 1월 31일자 천지일보에 이미 소개된 바 있다. 성 북편에 장엄한 고구려 석축이 그대로 남아있어 큰 감동을 받았다. 물론 이 성의 경우도 처음 축성은 초기 백제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이 성을 점령하여 일부 성을 보축하고 고구려식으로 재구축한 것이다.

특히 성 안에 산란한 적색의 수많은 와편들은 당시 이 성을 구축하고 지켰던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연상시켜주는 주요 유물이었다. 연질의 백제 와편에서부터 적색의 고구려 와편이 즐비하게 산란하고 있다. 물론 후대에 이 성을 점령한 신라계 와편과 토기들도 많이 수습된다. 

포천과 철원 접경에 주목되는 또 하나의 고성이 있다. 속칭 ‘보가산성(堡架山城)’이다. 문헌에는 보개산성(寶蓋山城, 이하 보개산성)이라고 기록되며 많이 알려진 성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에는 고구려 석축의 잔영이 장엄하게 남아있다. 길이도 고구려 본거지 지안 혹은 요양에 있는 고구려 큰 성들과 크기도 비슷하다. 

정연하게 돌을 다듬어 쌓은 성은 천수백년이 흘렀어도 그 웅장함을 자랑한다. 고구려 이후 신라 그리고 태봉, 고려가 주목한 곳으로 시대적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글마루 답사반과 한국역사유적연구원은 영하의 날씨가 지속되는 2022년 새해 첫 답사지를 보가산성 즉 보개산성으로 선정했다. 과연 이 산성 안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꽁꽁 얼어붙은 성안에서 고구려 역사를 증거할 유물은 수습될 수 있을까. 포천 반월성에서 적색의 고구려 와편을 수습했을 때의 기쁨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호랑이 해 벽두인 1월 초순. 답사반은 들뜬 마음으로 보개산성 답사 길에 나섰다. 만약 보개산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확인되면 지금까지 모두 36개의 고구려 산성 유적을 찾는 개가를 울리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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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에 기록된 보개산

목은 이색이 지은 보개산 시

보개산은 28개의 장엄한 봉우리와 36개소의 절경지로 유명하다고 한다. 옛날에는 골짜기마다 신성한 곳이면 부처를 모신 불당이 건립되어 있었으며 등을 켜면 마치 밤하늘의 별빛만큼 불야성으로 빛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지금 불적은 모두 사라졌다. 웅장했던 법당 등 불교건물은 모두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구한말 항왜 의병과 민족상잔인 6·25 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불교문화재가 멸실 파손되어 지금은 단 한 곳의 옛 절도 남아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는 것이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분이었던 목은 이색이 보개산에 올라가 지은 <석대사(石臺寺) 중수기>가 전해진다. 석대사(石臺寺)는 신라 때 지은 고찰이었다. 사냥꾼 이순석이라는 사람이 돌부처를 발견하여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이색은 절 중수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산에 노니는 맛이 감자를 씹는 것 같아서

점점 좋은 경치 속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네

구름을 바라보니 한껏 무심해지고

냇가를 거닐면서 홀로 그림자만을 짝 하네

종소리에 숲과 마을이 비었는데

전각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차가워라

매우 푸르름을 변별하느라

바람 앞에 서서 세 번을 반성하였네 

 (意譯)

 

이색이 다녀간 지장사 지장봉(地藏峰)은 해발 877m로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에 위치한 산이다. 연천군 신서면과 포천시 관인면의 경계를 이룬다. 지장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보개산(寶蓋山)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위치는 연천현 동북쪽 20리의 철원 경계부로 되어 있다. 또한 보개산고성(寶蓋山古城)이 동북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둘레는 4리이고 그 가운데에 우물이 3개 있다고 기록하였다.

<여지도서>의 기록에는 보개산이 철원에서 서남쪽으로 17리 지점이며 이로부터 맥이 서쪽으로 달려 불견산(佛見山)으로 이어진다고 되어 있다. <연천읍지>에는 ‘거리가 30리 지점이며 이 산의 찬취암에 오르면 철원을 조망할 수 있다’고 기록된다. 

<해동지도>에서는 연천현의 남동부에 영평과의 경계부로 표기되어 있다. 산의 남사면 골짜기에는 지장암이 있으며 지장골이라는 마을도 자리하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보개산과 지장봉이 병기되어 있는데 높이는 877m로서 연천군과 철원군의 경계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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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개산성 능선의 석축. 반듯하게 다듬은 돌이 보인다.

보개산에 축조된 고성

이 산성에 관한 기록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조선고적조사자료>에 처음 나타난다. 조선시대의 문헌자료에는 기록이 없다. 이 자료에는 보개산성이라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의 명칭은 보개산의 이름을 따서 보개산성(寶蓋山城)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보가선성’이 된 것은 보개산성의 음운이화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현재 지장봉으로 불리는 최고봉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를 보개산(寶蓋山)이라 불렀다. 이 산이 보개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가 아니었을까. <유점사본말 사적(楡岾寺本末事蹟)>에 민지(閔漬, 1248∼1326)가 지은 보개산 석대기(寶蓋山 石臺記)에 나온다. 

또한 보개산성지는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축조하였다고 하여 ‘궁예성지(弓裔城址)’라고도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궁예는 이곳에 성을 쌓고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패전하고 말았다.

궁예는 한밤중에 남은 군사를 이끌고 명성산(923m)으로 도망을 갔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재기를 꾀해 보지만 민심마저 이반하자 스스로 군사를 해체하기에 이른다. 그때 궁예의 군사들이 3일 동안 슬피 우니 산은 ‘울음산(鳴聲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은 애끓게 흐르고 흘러 ‘한탄강’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고려 말 시인 강희백(康希白)은 태봉의 몰락한 역사를 시로 담았다. (<동국여지승람> 제47권 철원도호부 제영 조)

산은 옛날 천년 한을 머금고

구름은 긴 공중 만리의 마음을 안았네

예부터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까닭이 있으니

원하건대 앞 수레의 엎어진 것을 보고

미래와 현재를 경계할 지어다

 

조선 전기 문신이자 명필이었던 권건(權建 1458~1501)의 한시는 더 쓸쓸하다. 그는 인품이 평범하지 않고 훌륭하여 ‘신선 같은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또 그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자 태학(太學)의 여러 유생들이 ‘이제야 채근(採根)할만 하다.’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역시 <동국여지승람> 철원도호부조에 시가 실려 있다. 

동주(東州. 철원의 별호)의 성 아래 풀이 우거졌구나

한번 바라보니 쓸쓸한 광경 

흥망성쇠를 느끼게 하네

끝내 신광을 찾을 곳이 없는데

당시의 기이한 참언(讒言)을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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