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 답사기①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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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준 SG전략연구원장, 왕릉답사가

조선 개국 초기 30년의 역사에서 단연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태종. 그는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다 간 왕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으로 갈린다. ‘주어지는 왕의 자리보다 기어코 왕위를 손에 움켜쥔 왕’으로서 똑똑한 머리와 끓어오르는 가슴으로 주변을 쥐락펴락했다. 조선왕 중 유일하게 과거급제한 그는 조선 초기의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최고의 임금 세종을 만들었다는 치적과 함께 냉혈의 군주로서 인정사정없이 정적은 물론 이복형제와 처남들, 며느리의 친정까지 멸문에 이르게 한 점에서 양극단의 처세를 보였다. 태종과 함께 정치적 야심의 지략가이자 한 여성으로서 지아비에게 분을 삭여야 했던 원경왕후의 헌릉을 찾아가 그 스토리를 들어본다.

◆사실상 조선을 개국한 실세? 

조선 초기의 역사는 태종 이방원을 빼놓고는 논하기 어렵다. 태조에서 세종까지 4대에 걸친 정국에 그만큼 영향이 컸던 인물이다. 이방원(태종)은 1367(고려 공민왕 16)년 함흥 귀주동에서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공부도 잘했는데 조선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문과에 과거급제를 했다. 하나뿐인 동복동생 덕안대군 방연도 15세에 과거 급제를 했다. 태종은 왕조가 바뀌면서 아버지의 신료이자 정치적 경쟁자들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법과 제도를 정비해 왕권을 강화했다.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기까지의 배경은 우선 이성계와 정도전의 곁에서 오랫동안 지략을 익혔고 또 하나는 정적이나 경쟁자를 과감하게 ‘무력’으로 제거한 데에 있다. 권력에 집착해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군권을 놓지 않았다.  

1421년 11월 8일 그는 상왕에서 태상왕, 정확히 성덕신공태상왕으로 존호가 올려졌다. 이때 실록은 “전하께서는 개국하여 어버이를 높이시고 정사하여 형님에게 왕위를 사양하였으니 (중략)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였다”로 기록하고 있다. 당초에 왕은 이방원의 것이었는데 아버지와 형에게 기회를 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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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창덕궁은 1405년 태종이 한성천도를 위해 건립했고 재위기간동안 거처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인정전은 ‘어진 정치’를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17

◆왕권과 국가기강을 확립하다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신흥사대부들에게는 완고한 고려의 충신과 기득권의 반대를 극복하는 것이 난제였다. 이방원은 1388년 21세에 아버지와 형들이 위화도회군에 나서자 집안에 남아있던 가족을 무사히 대피시키는 역할을 했다. 1392(공양왕 4)년 3월 친어머니 한씨의 삼년상을 치르던 중, 이성계가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세자 왕석을 환영하러 나가 사냥하다 낙마해 중상을 입고 벽란도에 갇혔다. 정몽주 등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기회였고 마침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 세력은 귀양을 가 있었다. 이때 방원이 이제(신덕왕후의 사위)에게 소식을 듣고 달려가 아버지를 개경으로 모셔 와 화를 면했다. 조선왕조의 개국 전 1392년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가던 정몽주를 살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매우 격분했다.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국호를 조선으로 바꿔 첫 임금이 됐다. 조선 정국은 정도전이 이끌어갔다. 1392년 8월 태조는 신덕왕후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일부는 “시국이 평온할 때 적자를,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며 이방원을 지원했으나 태조는 결국 방석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개국공신을 책봉했는데 방원과 그의 형제들은 누락됐다. 불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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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의 출입구인 ‘인정문’.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17

4년 후 1396년 태조의 부인이자 강력한 후원자 신덕왕후가 세상을 떴다. 정도전 일파는 이방원의 형제들을 지방으로 보내고 사병 혁파에 나섰다. 방원과 형제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무력화되고 궁극적으로 제거될 것을 우려해 행동에 나섰다. 방원은 원경왕후, 하륜, 이숙번 등에 힘입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신덕왕후의 자식들인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 사위 이제를 처치했다.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이다. 

이방원은 새로운 권력 중심에 섰고 측근이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권력에 눈이 멀어 이복형제와 개국공신을 살해했다”는 여론을 의식해 형 영안대군(방과, 훗날 제2대왕 정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정종이 형제간 서열도 가장 앞섰고 왕비 정안왕후가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점도 있어 차기 왕위문제가 없기도 했다. 

1400(정종 2)년 공신 책봉에 불만을 가진 박포는 방간에게 “동생 방원이 왕이 되고자 왕자님을 제거하려한다”며 선동했다. 이에 방간이 나서자 방원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제압했다. 제2차 왕자의 난이다. 박포와 방간의 아들 이맹종이 처형됐다. 정종은 재위 2년 만에 방원을 양아들 형식으로 왕세자 삼고 이어 왕위를 물려줬다. 제3대 태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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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돈화문은 ‘백성을 화목하게 하다’는 뜻으로 1412년에 지어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17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치적을 남겨

왕이 된 태종은 6조(이·호·예·병·형·공)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했고 제도 정비에 착수했다. 지방은 8도 체제로, 호적제도의 정비와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서얼차대법도 제정했다. 1405년에는 수도를 송도에서 한성(창덕궁)으로 천도했다.

태종은 억불숭유정책을 강화해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하고 소속됐던 토지·노비를 몰수했다. 또한 비기(秘記)와 도참사상을 금해 미신 타파에 힘썼다. 여진족을 제거하고 회유해 변방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또한 1403(태종 3)년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인 계미자를 만들고,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토록 했다. 호포(戶布: 집마다 세금으로 베를 징수)를 폐지하고, 저화를 발행했다. 1402(태종 2)년 계급의 상하 간 소(訴)를 금하고 신문고를 설치했으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를 설치해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서 역모를 방지토록 했다. 아버지 태조가 닦아놓은 명과의 우호관계도 유지했고 내부적으로는 창덕궁을 건설하는 등 많은 건설공사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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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수결’. 오늘날의 서명으로써 이름 이방원의 ‘遠(원)’자를 형상화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17

◆남편 왕, 왕비인 아내에게는 ‘글쎄’

태종의 출세와 왕에 오르기까지 가장 공헌을 한 사람은 부인 원경왕후 민씨였다. 여기에는 장인 민제와 그의 아들 민무구, 민무질 등 이방원의 아래 처남들도 한 역할을 했다. 민씨 집안이 나서서 이방원을 지원한 것이다. 민씨는 1365년 송경(개성)에서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태어나 18세인 1382년 두 살 아래인 이방원과 결혼했다. 4남 4녀를 낳아 조선 왕비로는 두 번째로 많은 자식을 낳았다. 민씨는 수도 개성의 유력한 집안 출신이었다. 남편 못지않게 지략이 뛰어나고 결단력이 있어 이방원의 출세에 크게 기여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귀족들의 사병을 없애기로 해 왕자들은 병사와 무기를 모두 내놓아야 했다. 원경왕후는 이에 대비해 어느 정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뒀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밖 행랑에 모여 있었다. 전체가 공격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었다. 원경왕후는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며 집사를 보내 태종을 불러 달라고 했다. 태종은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나섰고 민씨의 동생 민무구, 민무질도 함께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이며 이방원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됐다. 1400년 민씨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물러나고 태종이 즉위하자 왕비(정비)로 책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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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정’은 창덕궁 후원의 연못 ‘반도지’에 있는 정자다. 창덕궁 건립 당시에는 없었으며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창덕궁에는 후원(또는 비원)을 조성하고 여러 연못과 정자를 만들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17

◆3대의 왕비 집안을 멸하다

태종은 주변의 많은 사람을 처형했다. 특히 권력욕이 강하고 경쟁자들을 용납 못 하는 그는 왕권이나 자신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는 세력들은 사정없이 처단했다. 태종은 아버지의 신덕왕후, 자신의 부인 원경왕후, 며느리 소헌왕후의 친정 식구들을 궤멸시켜 버렸다. 

1396년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이방원은 자신을 제치고 어린 방석을 왕세자로 삼은 강씨와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생모인 신의왕후 한씨에 대한 미련 등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1398년 신덕왕후 강씨의 두 아들과 사위를 모두 죽였다. 아버지 태조가 승하하자 신덕왕후의 무덤 주변에 집을 짓도록 허용하더니 나중에는 정릉을 해체해 외곽으로 옮겼다. 신덕왕후 강씨를 어머니나 왕비가 아닌 아버지의 첩으로 여겼다.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도 쑥대밭이 됐다. 1406(태종 6)년과 1409(태종 9)년 양위소동을 적극 말리지 않고 세자를 끼고 권력을 행사한다며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사사했고 이들의 죽음이 억울했다고 하소연한 민무회, 민무휼까지 자진을 명하였다. 결국 원경왕후의 동생 4형제가 죽고 말았다. 나중에는 사돈이자 세종의 장인 심온(소헌왕후심씨의 아버지)이 세도를 부린다며 죽이고 그 부인과 딸을 천민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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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정’은 1707(숙종 33)년 창덕궁 후원에 세운 정자다. ‘부용’은 연꽃을 말한다. 건립 당시 이름은 택수재였으며, 1792(정조 16)년에 바꿨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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