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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創製)는 한자에 대한 세심한 연구의 바탕위에서 이뤄졌는데 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새로운 체계로 정리한 음운서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刊行)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명나라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요동에 있을 때, 성삼문(成三文)과 신숙주(申叔舟)는 한자의 음(音)과 운(韻)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묻기 위해 열세번이나 요동을 왕래하였다고 하니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하여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들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한편 학사들의 이런 적극적인 열정에 못지않게 세종(世宗)의 훈민정음에 대한 집념 또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세종 또한 침식(寢食)을 잊을 만큼 관련 책을 읽으면서 훈민정음 연구에 매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443(세종 25)년 12월 나라글 28자가 완성되었으니 세종실록(世宗實錄) 25년 12월 30일자에 기재된 내용을 인용핟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며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와 우리나라 세속의 말을 모두 쓸 수 있으니, 글자는 비록 간단히 모여지는 것이지만 그 전환이 무궁하다. 이것을 훈민정음 이라고 일렀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은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과의 외교적인 갈등 및 최만리(崔萬理)를 중심으로 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세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했던 세력과 반대 집단 사이의 세계관(世界觀) 대결이었으며 중국 문화로부터 조선 문화의 독창성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볼 수 있었다. 아울러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해 세종의 친제(親製)라고 기록되었으나 그 창제 경위가 뚜렷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즐기었던 일생을 보던지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음의 원리를 밝힌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내용을 비추어 볼 때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그 정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글자를 어떻게 어디에다 쓰려고 만든 것인가 함은 뚜렷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글자의 창제는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하였으나 전자(篆字)를 참고하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글자의 소리를 정리한다는 일은 명나라 한자음(漢字音)의 연구 정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한 우리나라 한자음의 정리를 뜻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글자로 다루던 것이 한자이었으니 한자의 구성과 음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다시 새로운 글자의 획(劃)을 찾아낼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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